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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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가까이 다가온 전쟁들
형제자매 여러분,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계속 들려 불안하신 분도계실 것입니다. 게다가 그 일들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으니 여러분의 사랑도 흔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멸망이 가까워진 만큼 구원자의 나라가 가까워진다
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전쟁이 임박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와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토리노의 막시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엑카르트는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말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첫째 오솔길에서, 말씀은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무르는 무엇임을 확인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부터 흘러 나오되 안에 머무르기도 한다. 말씀은 베일을 벗기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도 사람이 하느님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폭로하고 상기시킨다.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말씀이야말로 하느님의 유일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말씀은 하느님의 자기 표현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끊임없이 발설하지 않을 수 없고 낳지 않을 수 없는 자연발생적인 말이다. 말씀은 아버지와 한 뿌리다. 말씀은 신성의 뿌리에서 태어난다.
바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하나의 씨앗으로 태어나 하느님의 말씀을 낳는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과 자신의 모상을 보여 주었다. … 그리고 그분은 모든 지혜와 모든 지식과 모든 덕의 뿌리인 좋은 씨,곧 신적 본성의 씨를 뿌린다. 신적 본성의 씨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자인 까닭은 이 씨앗이 우리 안에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리스도, 곧 유일한 말씀에만 몰두하는 것은 그분이 더할 나위 없는 시인처럼 그것을 단 한 마디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버지’ 는 한 ‘말씀’ , 곧 자신의 ‘아들’ 만을 말했다. 이 한 마디의 ‘말씀’ 만으로 그분은 모든 것을 표현했다. 그분은 왜 단 한 마디의 말씀만을 했는가? 왜냐하면 그 말씀에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말씀이다.“하느님은 한 마디만 한다(욥기 33). 그분은 말하면서 지신의 아들을 낳는다. 왜냐하면 그 아들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말하면서 피조물을 창조한다."(511)
<금주간 성서읽기> 1티모 1-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제2부
예수 성심에 대한 묵상
제10장. 성심 신심에 필요한 자세에 대하여
세 번째 태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
이 태도는 앞의 두 가지 태도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삶과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큰 열망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배부를 것이다.” (마태 5,6)
이 열망은 단순히 지성의 차원에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를 인정하는 추상적 동의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변적 동의는 기껏해야 메마르고 쓸모없는 ‘좋은 의향’에 불과합니다.
진실하고 간절한 열망은 우리의 정신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늘 생각하고, 끊임없이 말하며, 언제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안주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런 갈망입니까?
만일 아니라면, 우리는 분명히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늘의 “주림과 목마름”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주, 그리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성심께 참으로 신심 깊은 이가 될 수 있습니다.(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