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도 꾸짖고 바람과 호수도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경우의 꾸짖음에 의아해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당신이 배 안에 함께 계심에도 풍랑에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자
겁을 내는 제자들을 꾸짖으심에 대해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믿을지라도
엄청난 자연 재앙 앞에서 겁을 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경우에 겁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처럼 잠자고 계신 것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겁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 잠자코 계신 것 같고,
그래서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잠을 자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는데도 주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상황 설정은 이런 우리의 느낌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잠자고 계신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잠자고 계신다고 의심하고
심지어 우리 배에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큰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님께서는 잠자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잠자코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잠자코 있는 것과 잠자고 있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잠자고 계신 것은 우리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적어도 모르시는 것이지만
잠자코 계신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에 왜 알면서도 잠자코 계시는 겁니까?
정말로 무관심하실 정도로 우리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잠자코 계심도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구원을 원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구원이 없음을 알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을 멈출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잠자코 계심은 참고 기다리심이지 무관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원하고 구원해주시길 청할 때까지
주님께서 외려 참으시는 것이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직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없는데도 자기가 밥 먹겠다고 고집부리면
엄마는 그런 애를 잠시 내버려 두고 잠자코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겁을 낸 것은 잠자코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한 결과이지
태풍을 잠재울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잠재우실 수 없다고, 구원해 줄 능력이 주님께 없다고 믿었다면
구해달라고 했겠습니까? 아예 주님을 찾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부족해 겁내는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이런 뜻에서 꾸짖으신 거라고 이제 우린 이해할 수 있는데
호수와 바람을 꾸짖으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연현상을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엄청난 자연현상도 꾸짖고
복종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자연현상 앞에서 벌벌 떨지 꾸짖지 못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고 그것을 복종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드러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