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르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한 주님의 답입니다.
첫째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율법 학자의 요청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은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거부하시는 말씀 곧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에 율법 학자가 따른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기쁘셨을 것입니다.
다른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시비만 거는데
이렇게 따른다고 하니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성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을 따르려면 정말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만 하십니다.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귀한 집 도련님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겠느냐?
이렇게 염려하시며 따르겠다면 이것을 각오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아한 추종이란 없습니다.
낭만적인 추종도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면 애인 추종이나 할 것이지
주님 추종은 아예 생각지도 말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말고도 다른 곳에서 당신 추종에 대해 준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와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청하자 아주 모진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래서 이 말씀들대로 주님을 따르면
거의 틀림 없이 중간에 회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뭣 하러 따르는가? 이러려고 따르는가?
그래서 따르길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도 계속 따르기로 한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며 새 각오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을 각오하지 않고 당신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악을 각오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최악을 각오함이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없고,
최악을 각오할 때 최선도 다할 수 있게 됨을,
최선을 다하기에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