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깊은 구렁 속에서(Miserere 중에서)
작가 : 죠르주 루오(George Roault : 1871-1958)
크기 : 판화 43 x 60 cm
소재지 : 미국 버팔로 AKT 아트 뮤지엄
성미술의 소재는 이 세상 어떤 것이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다 성미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작품성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니 우리가 보고 만나는 모든 것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다 신앙의 가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말씀과 행적의 원천인 성서의 내용은 아무리 과장해도 모자랄 만큼 성미술의 진수를 표현한 것인데, 작가의 이 작품은 “하느님 자비하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시편 50편의 참회를 나타내는 miserere라는 판화집 속에 등장하는 한 작품이다.
쉰 여덟점이 실린 이 판화집은 그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한 번씩 다시 인용 할 만큼 작가가 중요시 여긴 주제들이며 이 작품은 1914년에서 1918까지 1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격랑의 가운데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구상된 작품이기에 그의 온 영혼이 담겨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작 당시 이 작품은 주위의 관심을 끌지 못한채 지내다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나치로부터 퇴폐 예술로 분류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작가는 바로 이것이 반어적인 표현으로 자기 작품의 가치가 드러나는 계기로 보았다.
한마디로 악마의 잔재와 같은 나치 정부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작품이 지닌 인간적 바탕과 복음적 표현의 긍정성이 인정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미세레레는 크리스챤들이 성서 다음으로 애독하는 준주성범의 현대판이며 주님의 수난이 주제이기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것이면서도 인간이 어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얻을 수 있은 희망과 위로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간상은 인간이 어떤 불행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린 개신교 목사로서 예술과 신학에 있어 탁월한 안목을 지닌 발터 닉은 작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는 신비가입니다”라고 작가는 그의 막역한 친구였던 수아레즈에게 쓴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근실하고 단순하게 살기를 원했다. 작가의 이런 신비적 종교성은 언제나 그의 그리스도 상에서 가장 강한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항상 십자가의 그늘에서 살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했고 예술원 사람들이 내세우는 “미의 고정관념을 싫어했다.”
이런 정신으로 그린 그의 작품은 항상 화려하고 밝은 색조의 성화에 익숙했던 당시 신자들에게 마음에 와닿을 수 없었고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나 관심은 신자들로 부터도 교회 당국으로 부터도 받을 수 없어 교회에 그의 작품을 남길 수도 없었기에 그는 나이 예순이 되어서야 첫 전시회를 할 만큼 주변의 인정도 관심도 얻지 못했던 작가였다.
한마디로 그의 성격이나 작품 취향 역시 누구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수줍은 인성과 작품이었기에 세간에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다가 참으로 예외적으로 교황 비오 12세의 관심을 받아 나이 여든이 되어 교황청 최고 훈장인 대그레고리오 훈장을 받음으로서 그의 작품이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칙칙한 색깔에 아무 색체적 매력도 없는 그의 판화 작품은 무었보다 대중성이 없어 신자들이나 교화 당국으로 부터도 사랑과 관심의 밖이었으나 그의 인생이 황혼이 되었을 때 진가가 드러나면서 수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 선 백부장이 “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8-40)라는 신앙고백을 한 것처럼 성미술에 있어선 더 없이 감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었다.
작가는 교회 참회 시편중에서 시편 50편과 함께 많이 사용되는 129편으로 이 작품을 그리고 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
주여 내 소리를 들어주소서 *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께 있사와 *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 하시나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주님께는 자비가 있사옵고 *
풍요로운 구속이 있음이오니,
당신은 그 모든 죄악에서 *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리이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주소서.
죄를 지은 상태에서 누워있는 주인공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기에 그는 망연자실 속수무책으로 누워있다.
즉, 완전한 절망의 상태이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희망이 있다.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직접 고백하면 그분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 희망이다.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께 있사와 *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 하시나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그러기에 주인공은 하느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기기에 벽에 있는 수난의 예수상을 마음에 새기며 희망의 불을 지피고 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
작가는 하느님을 향한 항심으로 혼잡스러운 불안에서 해방될 것을 재촉하고 있다. 하느님께 기도하며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올바르고 정직하거나 아니면 큰 잘못을 저지런 순간에도 반성과 회개, 그분에 대한 신뢰로 하느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처지에서도 꺽일 수 없는 크리스찬적인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