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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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요한이 거듭 제자들의 교만을 억제시키다
벌레가 자기가 태어난 나무를 갉아먹고, 녹이 자기가 나온 철을 파괴하며 좀이 양털을 못쓰게 만들듯이, 교만은 그것을 키우는 영혼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교만에서 벗어나도록 애써야 합니다. 요한도 온갖 설득력 있는 논리로 제자들의 교만을 억제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증언을 대단하게 여긴 나머지 내가 증언하는 예수님보다 증인이 더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아 두어라. 하늘에서 오시는 분께서 지상의 증인 덕분에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스스로 완전하신 분으로서 비할 데 없으신 분이시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현자들이 유대인의 어린 왕을 찾아 나서는 대목을 본문으로 삼아 이렇게 묻는다: 하느님과 사람의 합일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본문은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는 헤로데 왕 때 유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 그때 마침 동방에서 점성가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였다(마태 2,1-2).
엑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탄생이 어디에서 얼어났는가를 눈여겨 보아라. 이 영원한 탄생은 영혼 안에서 일어난다. 더도 덜도 아닌 영원 속에서 얼어난다. 그는 설교 17에서 합일이 두 순간이 아니라 일순간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본 설교에서 합일이 일어나는 자리는 두 곳이 아니라 하나의 성소 혹은 하나의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잘
라 말한다.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탄생과 영원 속에서 얼어나는 탄생은 같은 탄생으로서 영혼의 본질과 영혼의 터에서 일어난다. 이제 그는 어떤 장소보다 낫고,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이곳에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이 바로 영혼의 본질과 터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기도 하고. 영혼의 본질과 터이기도 하다. 설교 9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출산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 베들레헴, 새로운 피조물의 분만실이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참 육회를 살피려면 외부의 시설로 눈길을 돌리지 말고, 영혼의 본질과 터로 시선을 돌리라고 말한다. 우리야말로 새로운 베들레헴이다. 현자들은 바로 여기 우리의 한복판에서 신성을 찾는다.(380)


<금주간 성서 읽기> 사도 15-19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드디어 한 분의 주교가
파티마의 성모님 덕택으로 병이 나았다는 기적적 치유의 소식은 방방곡곡에 퍼졌고 가톨릭 신자는 거의 전부가 일치되어 교회 당국의 공식 성명을 바랐으며 이의를 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지경이었다.
성직자 편에서는 아직도 의견들이 달랐다. 다수의 성직자는 발현의 초자연성을 믿었고 그 중에는 개인적으로 순례단에 끼어 함께 기도한 이도 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직자는 발현 당시 리스본 주교좌에서 발표된 지시대로 아직 신중한 대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극소수이기는 하나 그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이 사건에 말려들어 위험에 처한 종교의 위신을 옹호한다는 구설하에 진실한 발현에 대한 실질적인 조사도 해보지 않고 이 새로운 ‘미신’에 반감을 품는 자도 있었다.
주교 자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쪽이 진실인지 뚜렷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을 느꼈다. 왜냐하면 의혹과 논쟁을 정지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교는 자문하기 시작했다.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또한 사회적으로도 일대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성모님은 인류를 구원의 길로 부르시는 데 있어서 왜 이 작은 교구의 한 구석을 선택하셨을까 ? 그리고 성모님께서 실제로 이런 벽촌을 선택하셨다 해도 왜 옛날에 그러하셨듯이 당신의 사자로 이런 죄없고 신심 깊은 목동을 선택하셔야 했을까/? ’
이렇게 생각을 집중해 나가자 호세 다 실바 주교는 교구에 부임되자 즉시 진지하게 새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이 신심의 기초가 되어 있는 발현과 세간에 나돌고 있는 기적에 관한 문제를 조사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