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회당장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말에 모순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도 가축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구유에서 풀어주는데
사람을 그 병에서 풀어주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축의 경우와 여인의 경우를
둘 다 '풀어주다'라는 동사로 연결하십니다.
같은 행위를 하는데
어느 것은 괜찮고 어느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굳이
어느 경우는 가능하고 어느 경우는 불가능하다면
사람들은 인간을 위한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반대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당장은 '풀어준다'는 똑같은 관점으로
두 상황을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안식일에 치유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만
이 상황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의 규정에 묶이다보니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즉 회당장은 또다른 관점에서 풀어질 필요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한 생각에 묶여있다보니
자유롭게 풀어지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서로 똑같은 것에 묶여있지는 않겠지만
내가 어느 하나에 묶여 있을 때
우리는 자칫
다른 사람이 풀려나기를 같이 희망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나는 비록 묶여있더라도
옆 사람은 풀려나기를 빌어주기보다는
그도 나처럼 여전히 묶여 있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 위해서
우선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혹시 어디에 묶여 있어
답답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선 하느님께 청하여 풀려 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될 때
아니 적어도 묶여 있는 나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