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는 그리움으로 씁니다
가을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어둠이 천천히 세상의 가장자리를 덮어오면, 오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던 그리움 하나가 살며시 고개를 듭니다. 낮 동안에는 미처 들리지 않던 마음의 소리들이 저녁의 고요를 따라 하나둘 돌아오고, 나는 시간 속에 머물렀던 그리움 하나를 꺼내어 편지의 사연을 쓰려 합니다. 하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 그리고 이름 없이 곁을 지켜온 작은 피조물들의 사연까지 그리움이라는 잉크에 묻혀 누군가에게 이를 띄워 보내렵니다.
바람의 결은 어느새 조금씩 서늘해지고, 숲과 들머리는 서두르지 않고 제 빛깔을 바꾸어 갑니다. 여름 내내 짙었던 초록은 조금씩 제 몸을 비워 빛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길가에 무심히 뒹구는 마른 잎 하나에도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되는 계절입니다. 그렇게 멈추어 선 자리에서 나는 그동안 시간 속에 가만히 묻어두었던 그리움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어 봅니다.
세월이란 참 무심하게 흐르는 듯하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 남겨진 온기만큼은 쉽게 데려가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많은 것이 지나갔고, 많은 것이 달라졌으며, 어떤 얼굴들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지만, 함께했던 시간의 온기는 오래된 나무의 향기처럼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불현듯 밀려오는 지난날의 기억은 때로 연한 슬픔이 되어 마음에 번집니다. 그러나 이제 그 슬픔은 예전처럼 날카롭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오래 품어 맑아진 슬픔은 저물녘 호수 위에 내려앉는 노을처럼 담담하고 은은합니다. 붙잡을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답고,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깊어진 빛으로 마음 한편에 오래 머뭅니다.
그리움의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웃었던 사람, 함께 아파했던 사람,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마음에 남은 사람, 말없이 등을 보여주며 떠나간 사람, 그리고 미처 다 사랑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사람까지. 그들 곁에는 우리가 함께 건너온 시간과 연민과 애틋함이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무게를 품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누구에게도 다 말할 수 없었던 사연 하나쯤 가슴에 품고, 때로 휘청거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를 건너왔습니다. 말없이 삼켜야 했던 침묵이 있었고, 깊은 밤 홀로 내려놓았던 한숨이 있었으며,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끝까지 견디어낸 날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와 그 시간들을 바라보니 그것들마저 가을 들판의 작은 들꽃처럼 애틋합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제 몫의 생을 다 살아낸 것들은 아름답습니다. 온 힘을 다해 삶을 안아 올렸던 손길과 이름 없는 수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조금씩 내어주었던 작은 사랑들을 생각하면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향한 연민이 가만히 마음에서 솟아납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저녁 하늘을 건너가는 새 한 마리와 길섶에서 마지막 꽃을 피우는 풀 한 포기, 찬 이슬을 머금고 아침을 기다리는 들꽃과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몸을 낮추는 억새까지, 가을이 오면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말을 걸어오는 듯합니다. “너도 많이 살아왔구나.” “너도 많이 견디어왔구나.” 그리고 그 작은 생명들의 침묵 앞에서 나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홀로 자신의 생을 견디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바라보며 함께 계절을 건너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가을의 그리움은 한 사람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향하고, 너를 향하고, 나무와 풀과 새와 바람을 향하며,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품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향합니다. 잎을 떨구는 나무는 이상하리만큼 슬퍼 보이지 않습니다. 한때 제 몸의 전부였던 잎들을 바람에게 하나씩 내어주면서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붙잡지 않고, 되돌려 달라 하지 않고, 비워진 가지 그대로 다가올 겨울의 침묵을 받아들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가지는가에 있지 않고, 때가 되었을 때 얼마나 평화롭게 놓아줄 수 있는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했던 것을 놓아주고, 지나간 시간을 놓아주고, 내가 옳다고 붙들었던 생각을 놓아주고, 나 자신마저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다른 존재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합니다. 어쩌면 가난이란 그렇게 마음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움은 지나간 것을 붙잡으려는 마음만은 아닙니다. 오래 사랑했던 것을 다시 소유하려는 마음도 아닙니다. 진실한 그리움은 오히려 멀리 있는 존재를 그대로 놓아주면서도 그의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입니다. 곁에 없어도 사랑하고,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축복하며, 나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가 걸어갈 길 위에 따뜻한 빛 하나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마음에 맺힌 그리움을 조심스레 꺼내어 편지 위에 올려놓습니다.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놓아주기 위하여, 되돌아오기 바라서가 아니라 잘 살아가기를 바라며,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래 기억하면서도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고 보면 편지를 쓴다는 것은 참 작은 기도와 닮았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보는 일, 멀리 있는 이의 하루를 헤아려 보는 일, 그의 기쁨을 바라며 그의 아픔이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일, 그리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거리에서도 그 사람의 안녕을 빌어주는 일.
기도도 어쩌면 그런 것이겠지요. 붙잡는 것이 아니라 맡겨드리는 것,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것, 내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 가을나무가 제 잎을 바람에게 내어주듯, 나도 이 편지에 오래 품었던 그리움 하나를 실어 보냅니다. 이 가을, 부디 당신의 마음에 닿는 바람이 너무 거칠지 않기를 바랍니다.
길을 걷다가 문득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날에도 당신의 그늘진 마음 한편에는 따스한 볕 한 줌이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로 마음이 지치는 날에는 길가의 작은 들꽃 하나가 당신을 위로하고, 혼자라고 느껴지는 저녁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하나가 당신 곁에 앉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삶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껴지는 어느 날에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늘 아래 나도 있고 당신도 있으며, 이름 모를 수많은 생명들이 같은 바람을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 멀리 있어도 같은 가을을 지나고 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저마다의 잎을 떨구고, 저마다의 상처를 품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며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비움의 끝에서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붙잡아두는 일이 아니라 오래 축복해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움은 돌아오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멀리서도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는 마음이라는 것을.
가을 편지는 그렇게 그리움으로 씁니다. 말하지 못했던 마음 하나, 놓아주지 못했던 기억 하나, 고맙다는 인사 하나, 그리고 오래도록 간직해온 축복 하나를 가을바람 사이에 조용히 접어 넣습니다. 가을꽃이 수줍게 봉오리를 열 무렵,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고개를 들어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그 순간, 아주 먼 곳에서 나 또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의 강 너머로, 계절의 바람 너머로, 말보다 깊은 그리움 하나를 띄워 보냅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당신이 머무는 자리에도 가을빛이 오래 머물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고, 떠나보내면서도 축복할 수 있으며, 그리워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기를. 그렇게 이 가을, 우리의 그리움이 마침내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따뜻한 기도가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