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조회 수 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첼로협주곡 속에 여무는 가을 1

 

어스름이 걷히지 않은 푸르스름한 방안,

열어둔 창틈으로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 때

첼로의 묵직한 활 하나가 깊은 침묵을 가릅니다.

세상이 미처 눈뜨기 전,

아직 덜 익은 가을의 문턱에서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가 나직한 숨을 토해냅니다.

 

칼날처럼 베어내는 비탄이 아닙니다.

오래 품어 맑아진, 참으로 연한 슬픔 하나가

선율의 결을 따라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번져갑니다.

아직 채 보내지 못한 계절에 대한 미련과

성큼 다가온 찬 기운에 놀란 마음들이

저음의 현 위에서 조용히 몸을 떱니다.

 

저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탄식은

홀로 품었던 그리움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리움과 또 다른 그리움이 새벽 공기 속에서 마주칩니다.

스치듯 얽히며 차오르던 애절한 고백은

마침내 어떤 말로도 닿을 수 없어

더욱 짙고 깊은 침묵이 되어 가슴 한구석에 무겁게 얹힙니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덜 여문 들판,

아직 노랗게 물들지 못한 연초록의 벼들이

새벽안개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며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부드럽게 들녘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밝고 시린 벼들의 여린 옷자락에서는

밤새 남몰래 맺혀 있던 이슬들이

눈물이 되어 뚝, 뚝 떨어집니다.

무언가를 속으로 채워내고 익히기 위해

저 여린 것들은 또 얼마나 시린 어둠을 견뎌냈을까.

 

오케스트라의 엷은 울림이 아득한 배경이 되어주고,

외로운 영혼처럼 홀로 솟구치는 독주의 선율.

가장 아픈 자리를 어루만지듯 흐르다

가늘고 아스라하게 허공 속으로 흩어집니다.

 

슬픔을 다 털어낸 자리에 남는 것은 서러움이 아니라

어루만져진 영혼의 서늘한 평온.

뚝뚝 떨구어낸 이슬 위로

차츰 엷은 햇살이 스며들며,

아직은 풋풋하고 쓸쓸한 가을 아침이

저 시린 들녘 끝에서부터 조용히 피어오릅니다.

 

오케스트라의 엷은 울림이

먼 산처럼 뒤로 물러앉으면

첼로의 독주는 외로운 영혼 하나가 되어

다시 홀로 솟아오릅니다.

 

가장 아픈 곳을 알고 있다는 듯,

말없이 그 자리를 오래 어루만지다가

가늘고 아스라한 한 줄기 숨이 되어

푸른 허공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선율이 지나간 자리에는

서러움보다 평온이 남습니다.

 

슬픔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슬픔이 충분히 어루만져졌기 때문입니다.

잊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리워해도 괜찮아졌기 때문입니다.

보내지 못했던 것들을 억지로 떠나보내지 않고

가슴 한쪽에 조용히 머물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밤새 맺혔던 이슬을

한 방울씩 내려놓은 들녘 위로

마침내 엷은 햇살이 번져옵니다.

연초록 벼들은 아직 익지 않았습니다.

가을도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안에서는

떠남과 익어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자유나눔 게시판

자유롭게 글을 남겨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65 첼로협주곡 속에 여무는 가을 2 첼로협주곡 속에 여무는 가을 2 여름을 보내면서 가을이 되고, 푸름을 내려놓으면서 황금빛을 품으며, 차가운 이슬을 견디면서 알곡을 채워가는 보이지 않는 시간... new 이마르첼리노M 2026.09.09 10
» 첼로협주곡 속에 여무는 가을 1 첼로협주곡 속에 여무는 가을 1   어스름이 걷히지 않은 푸르스름한 방안, 열어둔 창틈으로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 때 첼로의 묵직한 활 하나가 깊은 침묵을 가릅... new 이마르첼리노M 2026.09.09 9
1963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주님, 저를 가난하게 하소서.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제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 이마르첼리노M 2026.09.04 55
1962 푸른 종이에 쓰는 편지 푸른 종이에 쓰는 편지   하늘이 이토록 시리게 맑은 날에는 어디론가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구름 한 점 머물지 못하는 허공이 너무 넓고 깨끗한 백지 같아서... 이마르첼리노M 2026.09.02 71
1961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가난은 결국 보게 하는 힘입니다. 내 욕망의 안개가 걷히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 이마르첼리노M 2026.09.02 78
1960 뮤지컬 <프란치스코> 공연 알림 뮤지컬 공연 안내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올해 프란치스코 파스카 800주년을 맞이하여 저희는... 김레오나르도 2026.09.01 263
1959 가을이 걸어오면 가을이 걸어오면   가을이 걸어오면 하늘은 가장 맑은 빛을 풀어 산과 들의 이마를 짚습니다.   빛이 머문 자리마다 나무는 제 안의 빛깔로 깊어지고 들녘은 익... 이마르첼리노M 2026.08.31 75
1958 안개 속의 아다지오 안개 속의 아다지오   젖은 어둠이 숨죽여 내려앉는 밤 세상은 부드러운 안개 너울을 쓰고 천천히 가장 낮은 음역으로 가라앉는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성이던 ... 이마르첼리노M 2026.08.31 62
1957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오늘 복음 묵상)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오늘 복음 묵상)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 이마르첼리노M 2026.08.30 78
1956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글라라에게 가난은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흠 없는 외모와 젊음과 건강과 화려함... 이마르첼리노M 2026.08.30 66
1955 가장 고독할 때 쓰는 시 가장 고독할 때 쓰는 시   가장 고독할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시린 문장을 고릅니다. 창밖의 어둠은 잉크처럼 번져가고, 방 안을 떠도는 것은 식어버린 온기의 ... 이마르첼리노M 2026.08.29 82
1954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은 물건을 가지지 않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은 형제에게 자신의 필요를 말할 수 ... 이마르첼리노M 2026.08.29 68
1953 십자가는 극치의 사랑이며 사랑의 극치다 (2026,8.28 독서묵상) 십자가는 극치의 사랑이며 사랑의 극치다 (2026,8.28 독서묵상)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 이마르첼리노M 2026.08.28 69
1952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글라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라본다는 것은 눈으로 한 형상을 관찰... 이마르첼리노M 2026.08.28 79
1951 복음의 깨어있음에 대한 현실적 진단 복음의 깨어있음에 대한 현실적 진단   복음에서 말하는 “깨어 있음”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마르첼리노M 2026.08.27 110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1 Next ›
/ 13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