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글라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라본다는 것은 눈으로 한 형상을 관찰하는 일이 아닙니다. 바라봄은 마음의 팔을 벌리는 것이고, 내가 보고 있는 사랑이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이며, 내가 바라본 그분의 가난과 겸손이 내 삶의 모습이 되도록 나를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바라봄은 멀리 서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분의 침묵 안에 머무는 것이며, 그분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이 나의 관계와 말과 선택을 바꾸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 강한 것, 성공한 것, 흠 없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상처 입은 몸과 늙어 가는 육신과 실패한 사람과 버려진 이들의 얼굴은 되도록 보지 않으려 합니다. 매일 들려오는 전쟁과 재난과 죽음의 소식에 익숙해진 우리는 고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가고, 타인의 상처가 내 삶의 평온을 깨뜨릴까 두려워 시선을 돌립니다.
그러나 글라라는 바로 그 상처 입고 부서지기 쉬운 육신 안에서 하느님을 보라고 합니다. 수치스러운 십자가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아무런 매력도 없어 보이는 고통의 얼굴 안에서 우리를 향해 몸을 굽히시는 사랑의 얼굴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가난한 마음만이 그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다른 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고, 자신의 상처와 걱정만을 붙들고 있는 마음에는 타인의 눈물을 담을 여백이 없으며, 무엇이든 소유하고 통제해야 안심하는 마음에는 자유롭게 오시는 하느님을 맞이할 공간이 없습니다. 가난은 마음 안의 방을 비우는 일입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미리 정해 둔 답을 내려놓고, 상대를 내 생각에 맞추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야 한다는 요구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 빈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많은 말을 드리는 것보다 그분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나를 비워 드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기도는 나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내가 움직일 수 있도록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은총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내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오셔서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리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되기를 허락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을 이해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 벌거벗은 채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라는 거울 앞에 서면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함께 인간의 깊은 상처를 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내어주실 수 있는지를 보는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사랑을 거부하고 타인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지를 봅니다. 그 거울 안에는 나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함께, 나의 교만과 집착과 자기중심성으로 그분을 다시 못 박고 있는 나의 얼굴도 비칩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아름다운 모습만 찾는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나는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실과 함께 사랑을 거부해 온 나의 슬픔을 보며,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존귀한 존재라는 진실과 함께 타인의 존엄을 훼손해 온 나의 죄를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나를 절망시키는 거울이 아닙니다. 그 거울은 나의 죄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자비를 비추고, 나의 상처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며, 나의 부족함 속에서도 새롭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가난의 길은 시작됩니다. 나는 나 자신의 생명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며, 나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힘도 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무에서 불려 나왔고, 매 순간 존재를 선물로 받으며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내 호흡이 멈추지 않는 것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는 것도, 아직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도 모두 은총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하느님 앞에서 요구할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감사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본래 가난한 일입니다. 나는 나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땅과 물과 공기와 햇빛에 의존하며, 수많은 사람의 수고와 돌봄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내가 먹는 한 끼의 음식에는 씨앗을 뿌린 사람과 땅을 일군 사람과 비를 내려 준 하늘과 햇빛을 품은 계절의 수고가 들어 있고, 내가 입는 옷 한 벌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홀로 살아온 적이 없으며, 나의 독립이라는 생각은 실은 수많은 관계를 잊고 있었던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존재적 가난을 거부할 때 죄가 시작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받은 것을 내 소유라고 주장하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속한 선을 움켜쥐고 나 자신을 찬양합니다. 선물로 받은 재능을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고, 공동체 안에서 받은 사랑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며, 다른 이의 도움으로 이룬 일을 나 혼자의 성취로 포장합니다. 그렇게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순간 선물은 소유물이 되고, 감사는 자랑으로 변하며, 관계는 경쟁의 장이 됩니다.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일입니다. 빛을 향하고 있던 얼굴을 돌려 자기 그림자만을 바라보는 일이며, 사랑의 근원에서 멀어져 자신 안에 갇히는 일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돌아선 사람은 더 많이 가지면 충만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가질수록 더 큰 결핍을 느끼고, 인정받으면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지만 인정받을수록 더 깊은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도 자기 욕망만을 봅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관계를 맺어도 내가 얼마나 인정받고 사랑받는지를 계산하며, 기도를 하면서도 하느님의 얼굴보다 나의 소원과 상처와 요구를 더 오래 바라봅니다.
오직 가난만이 우리를 이 자기 걱정의 감옥에서 풀어 줄 수 있습니다. 가난은 내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내 상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상처도 함께 볼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열어 줍니다. 가난은 내가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게 하며,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신비 앞에 머물 수 있게 합니다.
가난한 기도는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라는 말에서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라는 고백으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당신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저를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