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치운쿨라 전체의 마지막 이야기
포르치운쿨라는 형제들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어 있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세상으로 파견되기 위하여 다시 복음으로 태어나는 자리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작은 성당에 모여 기도했지만 기도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지만 그 사랑을 자신들만의 위로로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길을 떠났고, 마을과 도시를 지나며 평화를 선포했고,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곁에 머물렀으며, 사람들이 서로 적대하는 곳에서 화해의 작은 씨앗을 심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수많은 연결 속에서도 깊이 고립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듣지 못하고, 많은 정보를 나누지만 진실한 아픔은 감춘 채 살아갑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지만 만족하지 못하며, 비교와 경쟁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립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자원으로만 취급되고, 가난한 이들은 발전의 뒤편으로 밀려나며, 약한 이들의 목소리는 효율과 성과의 논리 속에서 지워집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삶의 혁명을 요청합니다. 더 많이 가지는 삶이 아니라 더 깊이 나누는 삶, 더 빨리 가는 삶이 아니라 함께 가는 삶,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다른 이가 살아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삶을 요청합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구호보다 내 곁의 한 사람을 이용의 도구로 대하지 않는 태도, 자연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형제와 자매로 존중하는 마음,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과 공간을 누군가를 위하여 기꺼이 내어주는 실천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피조물의 신음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육화되지 않은 영성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난한 이의 울음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위로에 머문 기도입니다. 우리의 형제성이 공동체 내부의 친밀함만을 추구하고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의 형제성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흘러갑니다. 성부께서 모든 것을 성자께 내어주시고, 성자께서 모든 것을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께서 그 사랑을 온 창조 안에 흘려보내시듯,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도 세상을 향하여 흘러가야 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구원자라는 착각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파견된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나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작은 도구입니다. 도구는 자신이 주인인 척하지 않습니다. 도구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보다 자신을 맡긴 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듯, 포르치운쿨라의 사람은 자신의 몸과 시간과 관계를 하느님 나라의 도구로 내어드립니다.
작은 몫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체념하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기뻐하고, 내가 시작한 일을 다른 사람이 완성해도 감사하며, 공동체의 열매가 내 공로로 기록되지 않아도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에 있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이것이 내적 가난이며 작은 형제의 자유입니다.
작은 몫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타인의 몫을 빼앗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재능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그가 빛나는 것을 기뻐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충실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혼자 하려 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이 없어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믿기에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의 작은 몫은 아픈 형제를 돌보는 일일 수 있고, 어떤 이의 작은 몫은 공동체의 식탁을 준비하는 일일 수 있으며, 어떤 이의 작은 몫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이에게 전화를 거는 일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화려한 설교보다 침묵으로 곁을 지키는 것이 몫이며, 어떤 이에게는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공동체를 받치는 것이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몫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우리에게 오늘 내게 맡겨진 작은 사랑을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한 번 더 기다리고, 한 번 덜 판단하며, 한마디 더 따뜻하게 말하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어도 내 곁의 작은 등불 하나는 밝힐 수 있고, 모든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도 내 관계 안의 적대 하나는 끝낼 수 있으며, 모든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도 오늘 굶주린 한 사람과 빵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작은 몫이 하느님의 손에 놓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작지 않습니다.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수많은 이를 먹였듯,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로 자라듯, 작은 포르치운쿨라에서 시작된 복음의 불길이 온 세상으로 번져 갔듯, 사랑으로 바쳐진 작은 몫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됩니다.
선종 800주년, 다시 포르치운쿨라로
성 프란치스코의 선종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 성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복음의 길을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에서 형제성의 삶을 시작했고, 그의 지상 여정이 저물어 갈 때에도 이 작은 성당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작의 자리와 마지막의 자리가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처음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알몸으로 땅 위에 누워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그의 선종은 실패한 인생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선물로 돌려드린 삶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까지도 소유하지 않았고, 마지막 숨조차 하느님의 것으로 내어드렸습니다. 그는 죽음을 원수라 부르지 않고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을 지키려는 마지막 저항까지 내려놓은 사람만이 죽음을 자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는 생명도 죽음도 모두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였고, 그렇게 완전한 가난 속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한 사람의 진실한 회심일 것입니다. 누군가 먼저 낮아지고, 누군가 먼저 사과하며, 누군가 먼저 소유를 내려놓고, 누군가 먼저 배제된 이에게 문을 열 때 포르치운쿨라는 다시 시작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기쁘게 맡고, 병든 형제의 느린 걸음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며, 늙고 약해진 이의 존재를 부담이 아니라 축복으로 받아들일 때 프란치스코의 길은 다시 살아납니다.
내가 용서를 선택하는 순간 내 안에 작은 성당 하나가 세워집니다. 내가 나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때 작은 제대 하나가 놓입니다. 내가 형제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귀 기울일 때 작은 등불 하나가 켜집니다. 내가 소유를 나누고 자리를 내어줄 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립니다. 내가 피조물의 신음을 들으며 소비와 탐욕을 절제할 때 무너진 돌 하나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가난한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 설 때 포르치운쿨라의 종소리가 내 영혼 안에서 울립니다.
포르치운쿨라 축일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길이 있다고 말하고, 너무 깊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다시 세울 돌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식어 버린 공동체에도 작은 불씨 하나는 남아 있으며, 오래된 갈등 속에서도 용서의 문 하나는 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보다 먼저 포르치운쿨라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완전해진 다음에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상처와 실패와 부끄러움을 가지고 그대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 문을 지나며 우리는 우리의 무거운 갑옷을 벗고 다시 가난한 자녀가 됩니다. 증명할 필요도 없고, 포장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이보다 나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사랑받는 존재이고, 용서받은 존재이며, 다시 사랑하도록 파견된 작은 형제와 자매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다시 형제성으로, 다시 세상 속으로. 이 길은 서로 다른 세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갈수록 우리는 형제를 만나고,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수록 세상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으며,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다시 복음과 기도의 샘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이 세 길이 하나가 되는 자리입니다. 기도가 형제성이 되고, 형제성이 사명이 되며, 사명이 다시 기도로 돌아오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집입니다.
이것으로 포르치운쿨라에 대한 글을 마칩니다.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이 모든 이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6년 8월 25일 전남 장성 수도원에서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형제 O.F.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