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두 번째 이야기
작은 몫으로 충분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전쟁을 끝내지 못했고, 모든 가난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교회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나병 환자를 껴안았고, 무너진 작은 성당의 돌 하나를 들어 올렸으며, 적대의 경계를 넘어 한 사람을 만나러 갔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몫을 사랑했고,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몫을 통하여 온 세상에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곁의 작은 등불 하나는 밝힐 수 있습니다. 모든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내 관계 안의 폭력 하나를 끝낼 수 있고, 모든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오늘 굶주린 한 사람과 빵을 나눌 수 있습니다.
기후 위기의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는 없지만 나의 소비를 줄이고, 물과 에너지를 절제하며, 피조물이 살아갈 몫을 남겨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외로운 사람의 곁에 머물 수는 없지만 오늘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세상은 큰일을 이루는 영웅보다 작은 선을 오래 지속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처음에는 뜨겁지만 곧 사라지는 열정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는 충실함을 필요로 합니다. 프란치스칸의 작은 길은 세상을 단번에 바꾸려는 조급함이 아니라, 사랑의 씨앗을 심고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그 안에 큰 나무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누룩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작은 친절 하나, 한 번의 용서, 한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 세상의 거대한 구조를 즉시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이미 시작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세상을 완벽하게 만든 뒤에 오는 미래의 왕국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다른 이를 도구로 대하지 않는 것이며 약한 이가 자신의 존엄을 인정받는 것이고, 원수라고 여겼던 이에게 평화를 건네며, 나의 몫을 줄여 다른 생명의 몫을 남겨 줌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선은 이미 흐르고 있고, 폭력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사랑은 더 깊은 곳에서 생명을 낳고 있으며, 인간의 탐욕이 창조 세계를 상처 입혀도 성령께서는 여전히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현실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순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보면서도 절망에게 마지막 말을 허락하지 않는 영적 용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지만, 상처가 전부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죄와 폭력의 힘을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그보다 더 깊다는 사실을 신뢰합니다.
프란치스코의 평화는 갈등을 피하는 조용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말하기 위하여 적대의 한복판으로 걸어갔습니다. 평화는 안전한 거리에서 “싸우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원수라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몸을 놓고, 상대방도 인간임을 보게 하는 용기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거대한 국제 분쟁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식탁, 가정의 대화, 일터의 관계, 교회의 결정 과정에서도 평화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폭력을 주먹과 무기에서만 찾지만, 말과 침묵과 시선과 배제에도 폭력이 숨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것, 사람들 앞에서 그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 침묵으로 상대를 벌주는 것, 소문을 통하여 한 사람을 고립시키는 것, 권위를 이용하여 약한 이의 목소리를 눌러 버리는 것도 관계 안의 폭력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먼저 내 안의 폭력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뒤에 숨은 교만, 통제하려는 욕망, 상처받지 않으려는 두려움, 나와 다른 사람을 쉽게 적으로 만드는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칸의 평화는 단순히 화를 내지 않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진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존엄을 파괴하지 않는 힘입니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되 미움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잘못에 책임을 묻되 사람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응답하면 우리는 결국 폭력의 방식을 닮게 됩니다. 혐오를 혐오로 맞서고, 모욕에 더 큰 모욕으로 응답하며, 상대를 침묵시키는 것으로 승리하려 할 때 복음은 사라집니다. 복음의 평화는 악을 방치하는 수동성이 아니라 악의 방식을 거부하면서도 진실을 지키는 창조적인 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불의를 눈감아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원수의 행동을 정당화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에 맞서면서도 그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것이며, 그의 악행이 나를 같은 악의 방식으로 끌고 가지 못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술탄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자신의 신앙을 숨기지 않았지만 상대를 정복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한 인간으로 다가갔고, 무기 대신 자신의 가난한 몸을 내어놓았으며, 논쟁에서 이기기보다 평화로운 만남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서로를 너무 쉽게 적으로 만듭니다. 정치적 생각, 종교, 세대, 지역, 성별, 계층,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사람을 나누고, 서로의 말을 들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상대방을 하나의 이름과 낙인 안에 가둡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형제는 편을 나누어 미움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자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의견이 같다고 말하지 않지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의 존엄까지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상대방 안에 있는 진실의 조각을 들을 수 있고, 대화가 단절된 곳에 작은 다리를 놓습니다.
다리는 어느 한쪽만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두 편을 연결하기 위하여 양쪽의 무게를 함께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화해의 사람은 종종 양쪽 모두에게 오해받고, 어느 편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외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은 인정받기보다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것을 선택합니다. 자신이 옳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서로가 다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평화는 말에서 시작되지만 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평화는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 공동체의 자원을 나누는 방식, 불편한 의견을 듣는 자세, 갈등이 생겼을 때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행동에서 평화가 드러납니다.
평화를 외치면서 자신의 권한과 자리를 움켜쥔다면 그 평화는 비어 있는 말입니다. 가난한 이의 편을 말하면서 자신의 편안함은 조금도 나누지 않는다면 그 연대는 관념에 머뭅니다. 피조물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소비와 낭비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의 찬미는 아직 몸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생태적 회심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태양은 형제였고, 달과 별은 자매였으며, 바람과 물과 불과 땅은 하느님의 선성을 드러내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낭만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이 같은 창조주의 사랑에서 태어났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존재도 인간의 욕망만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깊은 관계의 진실을 살았습니다.
물은 단지 우리가 사용하는 자원이 아니라 생명을 품고 흐르는 자매이며, 땅은 마음대로 파헤치고 버릴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를 먹이고 품는 어머니입니다. 나무와 동물과 바람은 인간보다 낮은 배경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형제자매입니다.
이러한 눈을 지닌 사람은 피조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고, 쉽게 버리며, 다른 생명의 몫을 빼앗는 삶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절제는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금욕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살아갈 자리를 남겨 주는 형제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 한 방울, 음식 한 조각, 전기와 연료, 옷과 물건에는 수많은 사람과 피조물의 수고가 담겨 있습니다. 지나친 소비와 낭비는 단순한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이와 미래 세대, 말하지 못하는 생명들의 몫을 빼앗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