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6,13-20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차례로 물으십니다.
먼저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는 ‘남들의 말, 소문, 의견’을 묻는 물음입니다.
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제는 ‘너 자신의 고백’을 묻는 물음입니다.
신앙은 ‘남들이 뭐라 하는가’에서
‘나는 그분을 누구로 아는가’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행복하다!”
(또는 ‘너는 복되다, 너는 기쁘다’라는 뜻입니다.)
그분을 ‘알아본’ 그 순간이
곧 ‘복됨이자 기쁨’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첫 자리에
바로 이 ‘알아봄의 기쁨’이 놓여 있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평생 성경을 파고들어
그리스도를 ‘남의 말’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살과 피’(인간의 추론)가 아니라
‘아버지의 알려 주심’에서 왔듯,
참된 앎은 머리로 ‘쌓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선물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받은 앎은
언제나 ‘사랑’이 되어 ‘기쁨’으로 터져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십니다.
한 사람의 ‘고백’이 ‘반석’이 되어
교회가 그 위에 서고,
그 고백은 마치 ‘씨앗’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천 년 동안 수많은 ‘베드로들’이
같은 고백을 이어 심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신앙이 닿았습니다.
사랑·기쁨의 관점에서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물음은
결국 ‘사랑의 물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상대를 ‘참으로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알아봄은 늘 기쁨을 낳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그분을 ‘남의 말’로만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의 고백’으로 그분을 알아보는가?
나의 앎은 ‘사랑’이 되어 ‘기쁨’으로 터지는가?
나는 그 고백을 ‘씨앗처럼’ 다음 사람에게 이어 심는가?
주님,
남의 말이 아니라 ‘나의 고백’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그 앎이 사랑이 되어 기쁨으로 터지게 하시고,
그 고백을 씨앗처럼 이어 심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