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사랑은 상대의 속도에 맞추어 걷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가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걸음을 멈추셨고, 제자들의 이해가 더딜 때에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세상 속의 작은 형제는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보다 아무도 뒤에 남지 않도록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효율을 위하여 약한 이를 버리지 않고, 한 사람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속도를 늦출 줄 압니다.
함께 도착하지 못하는 성공은 형제적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에도 가장 약한 형제의 속도를 고려해야 합니다. 많은 일을 계획하면서 병든 이와 늙은 이, 젊고 경험이 부족한 이의 목소리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명을 이유로 공동체의 형제성을 희생한다면 세상에 전할 복음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형제성은 사명을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라 사명 자체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기 전에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봅니다. 우리가 형제라고 부르면서 경쟁하고 배제하며 상처를 덮는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복음을 전해도 설득력을 잃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관계가 복음의 첫 번째 선포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품고, 약한 이를 기다리며, 갈등 속에서도 대화와 용서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 자체가 분열된 세상에 보내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세상은 완벽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상처 입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관계를 세우려는 정직한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흠이 없다는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잘못을 숨기지 않고 진실 앞에 서며, 피해 입은 사람의 존엄을 회복하고, 구조를 변화시키는 회심에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완벽함보다 정직함을 통하여 복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의문, 신앙을 떠난 이들의 상처,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의 비판을 방어적으로 막지 않고 경청해야 합니다.
그들의 질문 안에는 우리를 회심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판을 적대라고 여기기보다 우리가 보지 못한 들보를 보여 주는 거울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방어적인 침묵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만남과 대화 안에서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모든 답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겸손은 신앙의 약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는 참된 가난입니다.
세상 속의 프란치스칸은 확신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의 이유를 온유하게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상대가 자유롭게 질문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듯 우리도 상대방의 양심과 여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조종하거나 두려움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존재가 초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며 “저들이 살아가는 기쁨과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게 하고, 그때 겸손히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말보다 앞선 삶, 주장보다 깊은 관계, 논쟁보다 따뜻한 환대가 복음을 전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찬미의 길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고통을 깊이 보았지만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습니다. 병과 실패와 죽음의 가까움 속에서도 태양과 물과 불과 땅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찬미는 고통을 부정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도 선의 흔적을 발견하고,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 행위입니다. 세상 속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우리는 문제만 보게 됩니다. 사람의 이기심과 제도의 모순, 공동체의 갈등과 피조물의 파괴를 바라보며 마음이 냉소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선한 노력조차 소용없다고 느끼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때 찬미는 우리의 눈을 다시 맑게 합니다. 악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악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게 하고, 작은 선을 발견하며 감사하게 합니다.
한 아이의 웃음, 병든 이를 돌보는 손, 낯선 이를 위하여 문을 여는 사람, 전쟁 중에도 빵을 나누는 이들, 상처받은 땅에 나무를 심는 작은 공동체, 오랜 미움 끝에 건네는 화해의 말 속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은 여전히 세상을 붙들고 있습니다. 찬미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 숨어 있는 은총을 발견하는 관상입니다. 감사할 것을 잃지 않는 사람은 절망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작은 선을 보고 그것이 자라도록 자신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선교는 찬미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았기에 그는 사람과 피조물에게 형제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악하고 버려진 곳으로만 보았다면 그 안으로 기쁘게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정죄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와 불의를 분명히 보면서도 모든 사람 안에 하느님의 형상이 남아 있고, 모든 피조물 안에 창조주의 선성이 숨 쉬며, 역사의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새로움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