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6,27-38
복음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너무 높은 이상이라 여겨 밀어 두거나,
나에게는 원수가 없다며 슬쩍 비켜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드신 예들을 보면
그것이 먼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학대하는 자,
뺨을 때리는 자, 내 것을 가져가는 자.
거창한 적군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대개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의 구조를 보면 흐름이 분명합니다.
먼저 세 번의 물음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되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세 번 모두 같은 말을 하십니다.
그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라고.
곧 주고받는 셈이 맞는 사랑은 누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표시는 사랑을 하느냐가 아니라
셈이 맞지 않는 사랑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리실 때
그분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성 대 바실리오는 이 대목을 두고,
우리가 자비로울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먼저 자비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새겼습니다.
받은 적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를 악물고 참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흘려보내라는 초대입니다.
마지막 그림도 아름답습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그 시대 시장에서 곡식을 되어 팔 때의 모습입니다.
정직한 상인은 곡식을 되에 붓고 눌러 담고
흔들어 빈 곳을 채우고 넘칠 때까지 부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되어 주시는 방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를 세웁니다.
‘너희가 되어 주는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내가 남에게 쓰는 되가 곧 나에게 쓰일 되라는 것입니다.
인색한 되로 재면 인색한 되로 돌아옵니다.
돌봄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의 범위를 다시 그립니다.
우리는 대개 돌볼 사람을 고릅니다.
고마운 사람, 갚을 사람, 알아줄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라 하십니다.
참된 돌봄은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됩니다.
닮음으로 자녀 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사랑은 셈이 맞는 사랑이 아닌가?
나는 돌볼 사람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남에게 쓰는 되는 얼마나 큰가?
나는 먼저 받은 자비를 기억하는가?
주님,
셈이 맞는 사랑에 머물지 않게 하소서.
돌볼 사람을 고르지 않게 하시고,
제가 받은 그 후한 되로 남에게 되어 주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