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례자 요한이 주님께 대해 말하는 것을 동사를 중심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나도 저분을 몰랐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내가 증언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왜 증언해야 하고 우리는 왜 증언해야 합니까?
그것은 지난주 세례를 통해 어른이 된 주님께서 처음 당신을 공현하셨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시고 하느님 맘에 드는 아들이심이 드러났지만
그걸 보고 안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고 세례자 요한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도 그렇고 우리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고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자 요한은 나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하거나 크게 문제시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어쩌면 알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고,
알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본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비(神祕)란 무슨 뜻입니까?
신적인 비밀이란 뜻이 아닙니까?
그리고 신적인 비밀이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고,
하느님이 스스로 비밀을 열어 보일 때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세례자 요한도 비밀을 성령께서 알아보게 하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관건은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알아봐야 하는데
그러기까지 조건이 있고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눈을 지니기 위해서는 영적인 겸손이 있어야 하고,
영적인 겸손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화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눈이 영적인 눈이 되기 위해서는
백태가 끼면 그 백태를 제거해야 하듯이
세속의 백태를 제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의 단련이 있어야겠지요.
어쨌거나 우리도 이런 과정을 거쳐
세례자 요한처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말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고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함을 각오하는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