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를 없애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버리자.”
예레미야만 아니라면 마치 누구의 말이든 잘 들을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예레미야를 죽인 자들이 예수님도 죽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레미야와 주님은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주님이 없어지고 나면 사제에게 가르침을 받고,
현인에게서 조언을 얻고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거라고 하지만
이 사제는 이래서, 저 예언자는 저래서 안 된다며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애초에 누구의 말도 들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듣고 싶은 말만 들었으며 도리어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과 다를까요? 다를 바 없나요?
일단은 다를 바 없습니다.
어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어제)
“너희 가운데서 높은 자가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오늘)
같으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접수하러 가시는 것으로 제자들을 착각하게 했는지
두 번이나 이미 수난 예고를 하셨고 이어 세 번째로 예고를 하셨음에도 주님의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스승님의 나라’니 ‘오른편과 왼편 자리’니 운운합니다.
그러나 역시 제자들은 다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주님을 죽이고는 자기들이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제자들마저 없애려고 들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늦게라도 주님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남은 삶에 할 바입니다.
우리도 아직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주님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 알아듣지 못한 것이 말씀의 뜻을 다 이해치 못했다는 뜻도 되겠지만
머리로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들어도 마음이 수긍하지 못하는
곧 마음으로는 종이 되거나 섬기는 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을 뜻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마음은 늘 늦됩니다.
그리고 다 했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 이해했다거나 다 실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달릴 바를 다 달렸다고 감히 얘기하는 것은 바오로 사도나 가능한 말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다 하지 못했다고 함이 좋고 프란치스코조차도 그러했습니다.
생애 말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
프란치스코가 남긴 이 말을 전한 다음 토마스 첼라노는 자기 생각을 덧붙입니다.
“그는 아직 목적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삶의 거룩한 새로움을 얻으려는 뜻을 꾸준히 지니면서 늘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다.”
여기서 ‘거룩한 새로움’과 ‘늘 다시 시작’이라는 말이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 무디지 말라!”는
초대송 후렴과 겹치면서 저의 마음에 와닿는 오늘 저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