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야곱의 사다리 (Ladder of Jacob: 1805 년)
작가 :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1757-1827
크기 : 수채화 37X 29cm
소재지 : 영국 런던 대영 박물관
대부분의 성화 작가들은 성서적인 내용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관람자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또 어떤 이는 성서적인 내용을 당시 유행하던 상징적 표현을 도입하기도 했다.
가령 성모님의 동정성의 상징은 장미와 백합이기에 꽃들을 성화에 사용하며 , 석류의 붉은 알맹이는 수난의 상징이기에 예수님의 성화에 그 상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작가는 좀 특별한 면이 있는 작가이다. 그는 시인이며 판화가이며 어린 시절부터 환시를 보거나 신앙 체험과 관계되는 기억이 많았기에 그의 성화는 주관적이며 신비적인 체험으로 많이 이어졌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 전체에서 종교성이 다 표현되고 있으나 특히 이 작품에서 그이 종교성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먼저 그는 이성으로 지성으로 설명되는 교리 수준의 교회에 있어 교회의 전통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면서도 지나친 일방적 교리 위주의 교회 보다 개인의 신심 차원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교회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 내용은 창세기 28장에 등장하는 야곱의 이야기를 작품화한 것이다. 야곱은 이삭의 아들로서 에사우와 한 형제였다. 우직한 형 에사우와 달리 교활한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의 마음에 들어 눈먼 아버지를 속여 형인 에사우에게 줄 장자로서의 축복을 대신 받자, 우직한 에사우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복수를 결심하자 겁에 질린 야곱은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망을 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잔꽤가 그를 막다른 위험의 길로 빠트린 것이다.
성서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새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가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에 하늘이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돈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는 그곳을 베텔이라 하였다 ”(창세기 28: 10- 13: 18-19)
인간적인 잔꽤를 부려 장자권은 얻었으나 생각지 못했던 에사우의 분노를 사게되면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멀리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된 야곱은 자업자득이 만든 쓰라린 여정에서 그는 몸에 익힌 자기도취에서 벗어나 인간적 고독과 두려움과 무력함을 느끼며 기진한 상태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어 있다.
그의 신세는 형을 속여 얻은 달콤한 축복이 아니라 그저 바닥에 누워 맨 하늘을 바라보면서 머리맡의 돌을 집어 베개 삼는 처참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암담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상선벌악 교리, 즉 착하게 살면 축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 다는 것 이상의 교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중요한 핵심이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랑해서 새 인생을 살게 만들지 결코 내치지는 않으신 분이심을 이 작품은 강조하고 있다.
야곱은 던져진 것 같은 외로운 처지에 바윗돌 하나를 베개삼아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다. 그의 왼손엔 비상시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준 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다.
참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막대기를 유일한 의지로 삼는 야곱의 가련한 처지를 알리고 있다.
그는 사고무친인 이 상태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보호를 의식하고 마음의 안정성을 찾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가의 주관적 체험을 통한 극적인 결론이 드러나게 된다. 야곱의 자세를 마치 요한 복음13장 23-26절에 등장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면서 천국의 비밀을 알게된 사도 요한처럼 그리고 있다.
즉 이 위기의 순간을 맞고 있는 야곱에게 그의 머리굴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던 사도 요한에게 보였던 주님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돌배게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야곱 위에 몇 명의 여자들이 머리에 생필품 처럼 보이는 무었인가를 이고 서 있는데 이것은 사고무친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야곱을 돕고자 하는 모습이다. 하느님은 이런 자상한 모습으로 잔꽤에 빠진 야곱을 돕고자 하신다.
천사들은 모두 날개를 달고 있는데 여기 등장 인물은 전혀 다른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지닌 편협한 종교의 틀에서 벗어난 폭넓은 종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교 밖에서도 천사란 단어를 자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큰 돈을 기부하는 사람을 “기부천사” 라 부르고 자기 이익과 무관한 일에 오만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천사란 말을 부담없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작가의 관점에서 너무도 타당한 것이다.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은 영적 존재인 천사뿐 아니라 인간 모습의 천사의 영혼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돕는 다는 것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하늘에서나 다 천사들의 보호 아래 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주관적 신앙 체험은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적 벌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에 그동안 교회가 회개의 차원이긴 해도 인간에게 가하는 벌, 즉 우리 교회같으면 교회에서 축출하는 파문이나 성사 집행 중지, 이것이 아니더라도 제도적인 종교가 지닌 가혹한 징벌 규정을 거부하는 작가의 생각을 하느님의 참 모습을 전하는데 더 정확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교회가 엄하게 하는 것은 미연에 신자들의 잘못을 미리 방지 예방한다는 선의의 차원이긴 해도 결과론으로 보면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어떤 종교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이 작가의 발상은 이런 면에서 교회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만드는 신선한 시도이다.
작가가 일생 동안 제도적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좋은 것으로 볼 수 없으나 그는 교회 밖에서 복음적 가치를 살아가면서 교회가 지닌 한계가 개선점을 제시했다는 것은 참으로 종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것이다
천사들이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인간안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안에서의 친교를 상징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 삶에 관심을 보이시면서 인간의 영적 가치만이 아닌 현세 삶의 가치도 소홀히 하시지 않고 보살피신다는 참으로 심원하면서도 폭넓은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종교에 열심하다는 것이 현세 삶에서 좁은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면서 열심할수록 더 편협한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안타깝지만 자주 본다.
종교가 편협해지면 광신자를 모으는 역할을 할 수 있으나 향기나는 종교인은 만들 수 없으며 오늘 우리 주위에 설치고 있는 추악한 종교인의 모습 확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순간 교의적인 경직된 태도로 성서를 받아 들이면 정확한 성서의 이해가 아니라 성서의 부분은 이해하면서도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실수를 할 수가 있는데 작가의 태도는 이 면에서 참으로 유연성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작가는 자기 삶 안에서 깊은 종교성과 신비주의 그리고 상징주의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에 그의 신앙 역시 교회가 그에게 알리는 객관적인 사실들의 수용만이 아닌 개인적 신앙 체험을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교회안에 몸담은 우리들을 자연스럽게 교회가 가르치는 객관적인 진리를 받아 들이면서 신앙이 주관적인 체험이 부족한 어떤 교리 수준의 나열에 그치면서 자기 마음에 와닿는 신앙체험이 놀랍게도 부족한 형식적 수준의 신앙에 머물기 쉬운데 이 작가는 바로 우리에게 주관적 신앙 체험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통해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등장시키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지지 않는 연결을 현실을 통해 구원에의 희망과 낙관적인 모습을 전하고 있다
영국의 시인이요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이 장면을 수채화로 그렸다. 전체적으로 화면 아래서부터 파란색으로 시작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노란색으로 달라진다. 황금 빛 하늘의 광명이 땅으로 퍼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야곱의 현실이 칠흑같이 어둡지는 않다.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우리 수준에 맞는 방법으로 돌보고 있다는 것이 교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