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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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루카 6,41-42)
제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위선자들
앞서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최후의 심판 때 단죄를 받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단죄하지 마십시오.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그대의 큰 잘못들과 거역하는 욕정들에서 그대 자신부터 건져 내십시오. 그런 디음에야 그대는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우리도 그분처럼 이 세상에 있으므로" 이 구절은 우리가 신성하며,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과 동등함을 일깨우는 의미심장한 진술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느님을 흡족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 곧 성령은 아들 안에서 비롯되어 아들에게서” 아버지에게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러한 평등을 다른 식으로도 표현한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다." 평등한 사람들만이 벗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하느님하고만 동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의 동무가 되는가? 우리는 탄생과 돌파 속에서 동무가 된다. 거기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거기에서만 신성의 참된 뿌리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실로 이와 동일한 탄생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외아들을 낳으시고,뿌리와 자신의 온전한 신성과 자신의 온갖 복을 그에게 주시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와 동일한 탄생 속에서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십니다.(467)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1-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누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주님의 기도- 기도의 모범
XI. 우리가 무슨 기도를 드리는지 알기 위해‘그리고 우리 자신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기도할 때에 반드시 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말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으셔야 한다든지 , 부드러운 마음을 갖도록 위로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이 언제나 거룩하게 공경을 받아 무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원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 도달하여 그분께 어떤 유익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유익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 나라는 우리에게 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이 나라에 대한 우리의 동경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우리를 위해 오고 우리가 이 나라에서 함께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께 순종하듯이 땅에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게 되도록 청하는 것이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우리는 또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이때 “오늘”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먹고살 만큼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빵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빵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빵으로 믿는 자들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성체성사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이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청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청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늘 하느님 곁에 있도록 우리 자신에게 말하고, 어떤 종류의 유혹에든 현혹되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악에도 시달리지 않는 그런 곳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우리 자신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이 마지막 부분은 매우 깊이가 있어. 그리스도인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자신의 깊은 곤궁에서 이 기도를 드리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큰 위로와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이러한 생각으로 시작하여 이 안에서 거닐며 이 생각 안에서 마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 기도의 내용과 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