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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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루카 6,32)
덕행이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지는 못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여기서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본디 애통하여 소리친디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는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운명을 애통해하신다는 뜻이지요. 또한 그분 말씀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그분은 그냥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시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기능한 일입니다. 악의 충동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지요
-요한 크 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엑카르트는 일체의 사랑이 일어날 수 있으려면 평등이 꼭 필요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 평등이 실제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혜로 사람이 신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에는 사랑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느님과 사람은 일면 평등하다. 거기에서는 한쪽이 다른 한쪽이 되지 않을 수 없고, 물이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과 동등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 모두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두 번째 유비는 만유내재신론적인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서로의 안에 있다. 엑카르트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시다”는 요한 1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서로 - 서로의 안에서 - 사랑하라”고 말한다. 서로의 안에 있음이야말로 평등과 하나 됨에 꼭
필요한 요소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분열되고 말 것이다. 다시 한번 결론은 평등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다면, 나는 하느님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은 나보다 더 높지 않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 엑카르트는 우리의 신화를 떠올리는 성서 본문을 채택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이 세상에 있으므로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지리라는 데서 우리 안에 사랑이 완전해집니다(1요한 4,16-17) •(467)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1-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내적 생활
겸손한 이 기숙생은 아주 쾌활했다. 맑은 양심과 그녀가 즐기는 내적 평화와 천국을 약속하신 마리아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그녀를 기쁨에 넘치는 성격으로 형성하였다. 그녀는 잘 웃고 농담을 던지면서 늘 기뻐했으며 슬기롭게 때를 타서 자연스럽게 주위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죄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으로 바친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약속에 고무되어 바쳐진 모든 희생과 고행은 아무도 셀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저 알쥬스트렐에서 프란치스꼬와 히야친따와 함께 읊던 봉헌문을 몇 번이고 거듭했을 것이다.
“아 ! 예수님 나는 주님의 사랑을 위해, 죄인의 회개를 위해, 교황 성하를 위해 그리고 성모님의 티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상해 드린 죄의 보속으로 이 고통을 주님께 바치나이다"
성 요한 축일의 저녁때였다. 기숙사 옆의 수정 광장에서는 대중 연예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불꽃도 오를 예정이었다. 기숙생 일동은 베란다로 나가서 구경할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루치아는 옆집에 사는 약제사가 이제 막 임종을 당했는데도 성사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루치아는 이 멋진 밤 구경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그것을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하여 모두들 죽어 가는 병자를 위해 모처럼의 이 즐거움을 단념했던 것이다.
루치아의 빌라르 체재 마지막 해에 새 원장이 부임해 왔다. 새 원장은 극버리에 루치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새 원장도 루치아에 대한 함구령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또 아주 엄격했다.
게다가 새 원장은 사람의 눈을 끌 만한 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말 볼품 없는 이 ‘통고의 마리아’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 것인지를 궁리하였다.
‘도대체 이 비천한 계집아이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도 탁월한 발현의 특전을 받다니 그럴 수가 있을까?’(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