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요즘 조금 피곤하면 눈으로 피곤의 증세가 나타납니다.
오른쪽 눈 실핏줄이 종종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러 가면 같이 일하는 자매가 신부님 또 눈이 빨개졌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때야 알게 됩니다.
이는 제가 저를 잘 보지 않는다는 표시지요.
거울을 잘 안 보거나 거울을 보더라도 저를 잘 들여다보지 않거나
저를 보더라도 얼굴이나 머리가 흐트러졌나 보기는 해도
제 눈을 들여다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생각하곤 했는데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본다는 오늘 주님 말씀 덕분에
다시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서
곧 ‘내가 무엇을 보는지’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남은 잘 보고 자기는 잘 보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사실 우리 눈이란 게 상대를 보게 되어 있지 자기를 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면 자기를 보지 않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식 성찰이란 말이 있듯이 시선 성찰이랄까 관상 성찰을 해야 합니다.
내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주로 뭘 보고 있는지
나를 보는지 남을 보는지,
나를 얼마나 자주 보는지,
남을 보더라도 남의 단점만 보는지 장점도 보는지,
하늘을 보는지 땅을 보는지.
하늘을 보면 얼마나 자주 보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선의 또 다른 문제도 성찰해야 합니다.
곧 나의 잘못을 보지 않기 위해서 남의 잘못을 보고,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남도 잘못한다고 하며
나의 잘못은 작다고 하기 위해 남의 잘못을 크게 만드는 잘못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
돌을 던져서 죽이려고 했던 요한복음 8장의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죄를 간음한 여인의 죄로 감추려는 인간의 집단심리를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고 하시면서
자기 죄들을 보게 만들자 그들은 늙은이부터 모두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남의 죄를 보지 말 것입니다.
나의 죄를 보지 않기 위해 남의 죄 보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죄를 보려고 애써야 하고,
없애기 위해서는 더 애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없애기 싫어서 보기 싫어하는 것이고,
없애기 싫어서 내 죄에 대해 눈 감는 것이며
없애기 싫어서 남의 죄 손가락질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