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루카복음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복음에서 군중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릅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이 세리나 이방인과 비교하는 것에 비해
루카복음은 죄인과 비교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나
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꿔주는 것 등은 죄인들도 하는 것이니
우리가 진정 당신의 제자라면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이런 자부심이랄까 영적 우월의식은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우월감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고 죄이기에
가지면 아니 되지만 주님의 제자라면 죄인들과 달라야 한다는 우월의식,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는 초월의식은 꼭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우월의식 또는 초월의식을 가져야 하고,
그것은 죄인들의 사랑이나 자비와 비교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내 사랑과 비교해 더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정도의 내 사랑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요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문제는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느냐 그건데
제 생각에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선 원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원수란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불행까지 이르게 한 사람이 아니면 아직 원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진 그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주님 말씀으로 행불행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누가 너희를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고
반대로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 기준이 이 세상이 아니라 저세상이었지요.
여기서 행복하면 저세상에서 불행하고,
여기서 불행하면 저세상에서 행복한.
이 세상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면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에.
그래서 원수도 이제 바뀌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만족케 하는 자가 원수이고,
이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자가 벗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 모욕과 학대 순교와 죽임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고 조건에 좌우되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라고.
‘어떤’이라는 조건에 좌우되어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고,
‘사람’이면 무조건 사랑해야 참사랑입니다.
잘해 주는 사람이면 나도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워한다면
그에 의해 곧 그의 조건에 의해 내가 좌우되는 곧 사랑도 미워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에 의해 사랑하게도 되고 미워하게도 되는,
그런 사랑은 이제 안녕이라고 말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