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아들 예수에게 젖을 먹이시는 성모님(Nursing Madonna, 1346)
작가 :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90-1348)
재료 : 대리석
소재지 : 이태리 피사(Pisa) 성 마태오 미술관
현대에 와서 여성의 유방은 성적인 상징으로 둔갑했다. 그래서 유방은 성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 외에 감추는 것이 예의 저럼 정착되었다. 그러기에 여성의 유방은 성적인 호기심 외에는 그러내는 것이 거의 밝은 면이 없는 실천적인 어두움의 영역이 되어 여성이 어떤 경우이던, 특히 자녀에게 수유할 때에도 유방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여겨 수유실이라는 특별한 시설이 도시에는 배려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여성의 유방을 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일면에는 의미가 있으나 이것은 유방에 대한 아주 편협하고 속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여성의 유방은 성적인 표현 이상의 대단한 고귀한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
성서에서 교회 예술에서의 유방은 이것과 전혀 다른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신성의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 신성이라는 것은 모성애와 양육이라는 성적인 의미와 비길 수 없는 모든 인간 삶에서 가장 심원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약 성서에서도 통상 젖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먹는 중요한 음식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 성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젖에 비기면서 다음과 같은 심원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음식인 말씀이 필요하다.”
가톨릭 교회는 예술적인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어머니로서 아들 예수를 젖먹이는 장면을 성덕의 표현인양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나 아니면 세속적인 호기심의 표현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모님의 젖을 드러내고 젖을 먹이시는 모습은 동정녀이신 어머니로서 성모님의 극진한 모성을 표현하고 있다.
젖을 먹이시는 성모님의 모습은 단순한 인간 모자 간에 있을 수 있는 생리적 표현이 아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예표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어머니로서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오늘처럼 성적인 표현을 강조하지 않는 곳에선 너무도 자연스럽고 평범한 모습이며 가톨릭 예술에선 심원한 영적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 조차 십자가의 재물로 바친 아들 예수님에 대한 성모님의 심원한 사랑과 슬픔과 연민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젖은 성성에서 생명의 음료임과 동시 하느님의 은총의 심원한 상징이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것을 먹이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서 모든 이에게 마음의 평화와 행복감을 선사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 삶의 너무도 평범한 삶의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신앙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 심취하게 만든다.
성모님이 젖을 먹이시는 것은 아들 예수님의 구원 계획에 기꺼운 동참의 자세이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크리스챤 영성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모님의 젖을 먹이시는 모습은 단순한 어머니로서의 행위를 넘어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를 통해 전달되는 영적인 양식을 상징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께서 수난하시기 전날 저녁, 주님께서 성체 성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험난한 세상 생활에서도 이길 수 있는 영적 양식인 성체성사를 주신 것으로 믿으며 성체 배령의 신앙의 최고 행위로 실천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통해 하느님 아들로서 세상에 전할 사랑의 영양소를 섭취한 것처럼 모든 크리스챤들은 성모님의 수유를 통해 하느님 사랑이 한 인간 어머니의 젖을 통해 전달됨을 확인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의 주제를 너무도 숭엄한 것으로 여겨 성모님과 아들 주위를 금색으로 칠하면서까지 영적인 가치를 높이고 있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성서에서 성모 영보나 승천 같은 성모님의 영광이 한껏 드러나는 순간 갖은 장식과 상징들을 동원해서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표현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비해 젖을 먹이시는 이 모습은 이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성모님이 예수의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극히 인간적인 일상의 면모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가톨릭 신앙의 깊이는 바로 성모님의 일상적인 이 삶의 모습이 예수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의 삶안에서 깊히 각인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성을 부여하고 있다.
교회의 신앙은 신학적 차원 위에서부터 출발하기 보다 크리스챤으로서 살아가는 시대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었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안에서 신앙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다.
위로부터 신앙의 사색을 하다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신 위선과 이중성 아무런 내용도 없이 말만 번드럼함 허구적 신앙의 모습이 되기 쉽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우리 가톨릭 신앙의 진정한 깊이는 바로 이 작품처럼 일상적인 것을 통해 드러낼 수 있다는 복음적 진리의 평범성 표현을 너무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은 개신교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와 가톨릭 교회의 칼 라너(Karl Rahner)라는 두 석학에 의해 하느님의 전혀 다른 속성인 초월성과 내재성의 관계가 명확히 제시되었다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하느님은 인간이 감히 다루기 어려운 존재이며 인간은 결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다. 신앙은 인간의 종교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적 계시 사건이다. 교회의 가장 큰 죄는 하느님을 인간의 욕망 정치 신학 체제로 축소하는 것이다. 이런 반면 하느님의 내재성은 하느님은 멀리서 찾는 대신 우리 존재의 가장 주용한 구석에서 그분의 숨결을 듣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처럼 내재의 날개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듣기 위한 영적 감수성이다. 그러나 그 감수성이 현실적으로 닫힌 채 날개를 접어 버렸다.”
이 작품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가장 명확히 표현하면서 신앙이라는 것은 거창한 신학이 아닌 일상의 평범성안에서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어머니의 모습, 더 나아가서 아들 예수를 젖먹이시며 흐뭇해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진면모가 드러나게 되는 사건임을 알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