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이 빛나는 밤에(Starry Night : 1890)
작가 : 빈센트 반 코흐(Vincent van Gogh)
크기 : 켐퍼스 유채 73.7 x 92.1 cm
소재지 :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25년 교회의 대희년을 끝내면서 레오 14세 교황님은 성 프란치스코 귀천 800주년을 기념하여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를 선포하셔서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즉 신앙의 핵심적 부분에 대한 쇄신의 기회를 제시하셨다.
우리는 보통 신앙의 외부적 열기로 신앙을 평가하는데 익숙해있다. 예를 들어 현행 우리 교회는 판공성사를 보지 않고 교무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외적인 냉담자로 분류되며 주일을 지키는 신자는 수계 신자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계라는 개념 안에도 엄청난 함정이 있다. 자신의 삶에 있어 하느님 체험이나 실천에 대한 것은 극히 빈약한 수준에서 행사 참여같은 것으로 신앙을 과시하다보면 신앙인의 삶은 공의회 문헌이 제시하는 “실천적 무신론자”의 수준에 머물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수계 생활이라는 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실재 삶은 믿지 않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저자거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현실이 이것을 증명하고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귀천 500주년 기념의 전대사를 선포하신 교황님의 지향을 따르는 것은 이 시대에 신경 써야 할 특수한 신앙 성장의 기회이며 이번 사순절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도 결핍되어 있고 꼭 필요한 우리 신앙의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모델로서의 빈센트 반 코흐의 작품을 보고자 한다.
목사의 아들로서 태어나 자신도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목사가 되고픈 그에게 기성교회가 보인 태도는 너무도 충격적인 실망을 주었기에 그는 예술을 통해 하느님을 찾기로 하고 예술가로서의 삶에 몰두했다. 그는 순수한 예술 표현으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은 제도적인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찌들린 위선이나 이중성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길이라 생각했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유일한 바램은 마치 수도자들이 그렇듯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백방으로 수소문 해서 그와 함께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 지원자를 찾은 결과 프랑스의 폴 고갱을 찾게 되어 그는 무척 기뻤다.
그렇나 곧 그의 바램은 곧 실망으로 다가왔다. 고갱은 자유로운 성격에서 작가의 제안 역시 그냥 인간적인 외로움을 이기는 차원에서 부담없이 살고픈 마음의 방편으로 가볍게 결정한것인데 반해 순수한 영혼의 반 코흐가 보이는 강렬한 열망은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마음의 부담을 느껴 고갱이 떠나기로 결심하고 통보한다.
코흐는 다시 인간적 실망 이상의 충격, 과거 목사의 길을 걷고자 했을 때 그가 받았던 충격을 생각하며 슬픔과 분노를 참을수 없어 자기 귀를 자르는 실수를 하게 된다.

이 작품은 바로 귀를 치료한 후 성 래미라는 곳에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린 작품이다. 자신의 인생이 마지막 단계에 왔다는 절망 상태에서 그린 것이다.
새벽 병원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별이 총총한 하늘과 사람들이 사는 잠든 모습의 도시를 그렸다.

새벽에 바라본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하늘의 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면서 더 없이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지금은 폐인의 처지가 된 것 같은 자신의 암담한 현실에서도 자신의 미래 확실한 희망을 보는 것 같아 하늘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자신의 어려움을 잊게 만드는 큰 기쁨이었다.
작가는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면서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어려운 인생 여정을 끝낸 크리스챤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뵙는 순간을 묘사한 다음 성경 구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빚이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 무궁토록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2,4-5)

여기에 비해 하늘 아래 인간들이 사는 동네는 불이 켜진 곳이 별로 보이지 않고 더욱이 교회도 불이 꺼져 캄캄 절벽으로 드러나고 있다. 주일이면 교인들이 모여 그럴듯한 설교를 듣고 자기 소원 성취 수준의 기도를 한 후 몇푼의 헌금을 하는 것으로 신앙을 사는 것으로 여기는 신자들로서 득실대는 교회는 크리스챤 사회라고 하지만 이 불꺼진 교회의 모습이 그 실상을 바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보이고 있는 대다수 교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교회 꼴이 사회 꼴과 별로 다르지 않는 교회가 곧 사회요, 사회가 곧 교회인 오늘 이땅의 암담한 현실과 너무도 비슷하다.
마치 인공 위성으로 찍은 사진에서 북쪽과 남쪽의 너무 대조적인 모습을 연상시킨다. 기아 선상을 헤메고 있는 가난한 북녘은 평양 중심부를 제외하곤 캄캄한 반면 남쪽은 지상이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왼쪽에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작가의 모습이다. 사이프러스는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이기에 관상수로서는 사용치 않고 성지나 무덤에만 사용하는 나무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이 나무는 작가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에서 가장 어두운 색깔로 나타나는 이 나무는 세상의 눈으로는 실패한 작가의 상징이다. 그 나름대로 하느님의 뜻따라 살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작가였으나 당시 그는 종교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실패한 인간의 모습이되었다.
허나 작가는 순수한 열정으로 최선을 다했으나 너무도 어이없이 실패한 인간의 상징으로 나락에 떨어진 자신의 비참한 모습에서도 이것이 결코 자신의 전부가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나가는 과정으로 여기며 사이프러스 나무와 같은 집념으로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느님을 향한 끝없는 갈망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고틱 대성당처럼 너무도 당당하고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사이프러스 나무의 끝이 옆에 있는 불커진 교회의 탑보다 더 높은 것은 인간의 가치는 어떤 세상적인 평가나 성공으로 좌우될 수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이루어지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뜻을 살고자 노력하는 인간이 삶의 현실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속에서도 우리에게 닥아오시는 하느님을 치유자로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가지라는 권고를 자신의 비참한 처지의 모습을 놓고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성서의 구절 어느 것도 인용하거나 암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의 체험을 통해 너무도 힘있는 성서적인 진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 상상이 어려운 장애로 목사로서의 꿈도 예술가로서의 꿈도 접어야 했던 작가는 만신창이가 된 인간으로 형식적인 수계 생활을 과시하는 종교인들이 오르기 어려운 맑고 고귀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 조차 불이 커진 암담한 현실에서 하늘에 빛나는 별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확신하고 사이프러스 나무보다 더 우직스럽게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면 작가의 이해하기 어려운 불운한 삶은 신앙의 깊은 부분을 확인 할 수 있는 좋은 권고와 같다. 다음 시편의 작가가 지녔던 신앙의 깊은 뿌리를 안내하고 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 네 발이 휘둘림을 아니 버려 두시리라, 너를 지켜 주시는 님 졸지 않으시리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시리라."(시편 120,1-7)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알리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 셨다.”하고 말하였다.(마르 15,17)
이런 면에서 반 코흐는 현대적 의미의 성인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지닌 많은 인간적 약점 속에서도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복음적 실천을 위해 노력했고 인생이 부셔지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희망안에서 사이프러스 나무처럼 고고한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