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3,16–18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그리하여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한 구절은
복음 전체를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가
이 짧은 말씀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의 말씀을 사랑했고
말씀의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깊이 붙들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중심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보내시고 내어 주실 만큼
하느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이 먼저 하느님께 닿아 올라간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세상은 자주
하느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상상하려 합니다.
실수하면 버리시고
넘어지면 외면하시는 분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을 크게 열어 줍니다.
하느님의 첫 마음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이고,
배제가 아니라 구원의 길을 여는 사랑입니다.
성 예로니모의 관점에서 보면
“믿는다”는 것도
단지 교리를 아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진실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는 멀리서 심판만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머리의 동의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신뢰입니다.
두려움과 자기단죄에 갇히기보다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이가 전혀 잘못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삶의 근본 방향이
이미 빛을 향해 돌아서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어떤 내용을 모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사랑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느님이 먼저 쳐 내시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할 때
스스로 그 안에 머무르게 되는 비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성찰의 기준이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때
쉽게 부족함과 실패만 세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은 나를 없애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려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찰은
자기혐오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내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는 시간입니다.
나는 빛 쪽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숨고 싶은 어둠 쪽으로 물러나고 있는가를 묻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성체의 날이기도 합니다.
성체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단지 문장으로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실제로 자신을 내어 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양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일은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진실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며,
동시에 “나도 내어 주는 삶을 살겠다”는 응답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정말 믿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심판만을 먼저 떠올리며
그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사랑의 빛 안에 놓고 있는가,
아니면 숨어 버리고 싶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심판하기 위해서보다
살리기 위해 왔다.”
주님,
당신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시고
하느님께서 저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심판의 두려움보다
구원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며
저도 성체 안에서 받은 사랑을
작게나마 내어 주는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