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부끄러운 얘기인데 저는 30대 중반까지 몇 가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라는 말과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과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를라치면 닭살이 돋고 몸이 오글거리고,
불쌍히 여기시라는 말과 자비를 베푸시라는 말을 할라치면
속에서 왜 내가 불쌍해? 자비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세요! 라고 중얼거렸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거나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청하는 것은 여전히 싫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바라고 청하는 정도는 되었으며,
자비야말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청해야 할 것이고
베풀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자비를 청할 정도가 되어야 진정 겸손하고,
자비를 베풀 정도가 되어야 진정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30 중반에야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오늘 유다서의 말씀처럼 주님의 자비를 기다리다가
겨울에 햇볕 쬐듯이 은총의 창가에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자비를 쬡니다.
그래도 자비를 받는 것은 이 정도 되었는데 자비 실천은 어떤가요?
제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처지는 못 되지만
나누는 것은 잘해야 할 텐데 그러고 있을까요?
솔직히 얘기해서 가련한 이가 자신을 낮추며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리고 우러나서 하느님의 자비를 나눌 마음이 제게 있지만
나쁜 짓 하면서도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제가 겸손하게 청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웃의 죄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가 교만하기에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 자는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이며
그래도 수도자인 내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회개의 자비를 베풀어주십사고 기도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유다서는 이런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의 살이 닿은 것 때문에 속옷까지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두려운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라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런데 얼마나 미우면 그의 속옷까지 미워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토록 미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면
그 미움보다 큰 사랑이 있어야겠고 오늘 말씀처럼 두려운 마음도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자비 실천에 있어서 두려운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더 큰 죄 용서받은 내가 더 작은 죄 지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벌 받을 거라는,
받은 자비를 자기만 가지고 이웃과 나누지 않으면 벌 받을 거라는 두려움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바 있습니다.
만 탈렌트를 임금께 빚지고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처넣자 임금이 대노하여 그 신하를 다시 감옥에 처넣은 비유 말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야지만 하느님 자비를 청해 받고,
사랑해야지만 그리고 자비에 대한 두려운 마음도 있어야지만
자비를 나눌 수 있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