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되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36)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주시는 하느님의 방식을 배우는 학교에는 계산기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계산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저울과 추로 무게를 재는 곳이 아니라, 가슴의 넓이로 흐르는 곳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드러내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자비를 “해야 할 일”로 먼저 듣지만, 사실 자비는 “이미 받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우리는 값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는 그 빛을 살 자격을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은 우리 위에 내려앉고, 공기는 우리 폐 속으로 들어옵니다. 자비는 언제나 먼저 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비를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비를 통과시키는 존재입니다.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심판은 사실 마음의 방어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규정함으로써 내 존재의 불안을 잠시 가리려는 시도입니다. 누군가의 부족함을 바라볼 때, 내 안의 불안한 자아는 속삭입니다. “저 사람은 틀렸다.” “저 사람은 부족하다.” “저 사람은 잘못했다.” 그러나 자비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자비는 행위를 보되 존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비는 압니다. 그 사람 안에도 상처가 있다는 것을, 그 행동 뒤에도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그 왜곡 뒤에도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 있다는 것을. 심판은 단절을 만들고, 자비는 흐름을 만듭니다. 심판은 관계를 닫고, 자비는 관계를 열어둡니다. 심판하는 순간, 나는 흐름에서 벗어나 고립된 섬이 됩니다. 그러나 자비를 선택하는 순간, 나는 하느님의 강물 속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용서는 상대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닫힌 문을 여는 일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용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묶어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존재를 그 사건에 묶어둡니다. 내가 놓아주지 않는 한, 나는 과거 속에 머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느님의 손에 넘겨드리는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가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비가 나를 통과했다는 것을.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교환의 법칙이 아니라 흐름의 법칙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교환이 아니라 순환입니다. 우리가 움켜쥘 때, 흐름은 멈춥니다. 우리가 내어줄 때, 흐름은 계속됩니다. 사랑도 그렇고, 용서도 그렇고, 자비도 그렇습니다. 내가 자비를 붙잡아 두면 그것은 내 안에서 굳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자비를 흘려보내면, 나는 그 흐름 안에 머물게 됩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말합니다. 자비를 사는 사람은 이미 넘치도록 받는 상태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방식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되’가
우리 존재의 그릇이 됩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계시입니다. 내가 좁은 되를 사용하면, 나는 좁은 세계 안에 살게 됩니다. 내가 넓은 되를 사용하면, 나는 넓은 세계 안에 살게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넓은 존재 안에 삽니다. 그는 타인의 부족함을 담을 수 있고, 타인의 실수를 견딜 수 있고, 타인의 연약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렇게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심장이 뛰는 자리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흐름이 통과하는 자리입니다. 누군가의 실수를 보고도 정죄 대신 이해를 선택할 때, 누군가의 거친 말 앞에서 보복 대신 침묵을 선택할 때, 누군가의 닫힌 마음 앞에서 포기 대신 기다림을 선택할 때, 그 순간, 하느님의 자비는 그 사람의 심장을 통해 세상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은 깨닫습니다. 자비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도구 삼아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비로운 사람은 이미 그 나라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넘치도록 후하게 담긴 하느님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자유였습니다. 그 자유 안에서 그는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새의 노래가 그의 것이 되었고, 바람의 흐름이 그의 것이 되었고, 형제의 기쁨이 그의 것이 되었고, 형제의 고통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붙잡지 않았기에, 그는 모든 것 안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역설입니다. 붙잡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주어집니다. 내어줄 때, 모든 것이 머뭅니다. 비울 때, 모든 것이 채워집니다.
오늘 나는 관계의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내 안의 옛 자아는 즉시 반응하려 합니다. 자신을 보호하려 하고,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자신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조용히 기억합니다. 나는 사랑을 붙잡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가도록 허락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반응 대신 머무름을 선택합니다. 방어 대신 침묵을 선택합니다. 붙잡는 것 대신 내어줌을 선택합니다. 나는 사랑을 가진 적이 없었으나, 사랑 안에 머물렀다고. 나는 사랑을 붙잡은 적이 없었으나, 사랑이 나를 통해 세상 안으로 흘러갔다고. 이제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