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들과 달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아이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수천 명을 먹이시는데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실 뿐 아니라
어른의 것이 아닌 아이의 것을 가지고 먹이심을 돋보이려는 것 아닐까요?
틀림없이 아이 말고 어른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오병이어뿐 아니라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은 아이와 오병이어를 주님께서
은총의 도구로 쓰셨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는 수천을 먹이는 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우리 인간의 생각을 대표하여
안드레아는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자기의 생각을 얘기합니다.
주님께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소용이 없기로 치면 빵이 오천 개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이 없어도 수천을 먹이실 수 있기에
다섯 개나 수천 개나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안드레아보다 주님께 그것이 더 없어도 되지만
반대로 주님보다 안드레아에게 그것이 더 있어야 하지만
안드레아는 그것을 소용이 없다고 무시하는 것임에 비해
주님께서는 그것을 소용이 있는 것으로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능력과 사랑을 다 가지고 계신 것이고
안드레아는 그것을 소중히 쓸 능력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안드레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드레아처럼 먹이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능력은 없을지라도 사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먹이고 싶은 마음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시니,
주님께서 먹여주시고 저를 아이처럼 도구로 써주시며,
제가 가진 것 비록 보잘것없을지라도 봉헌하오니
오병이어처럼 소중히 써주소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어도 사랑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충만해야 하고 주저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시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반대로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우리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고,
오늘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처럼 주님의 뜻에 의탁하는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