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 삶을 바꿉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마지막 권고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충실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 안에서 자라나십시오."(2베드 3,18) 베드로가 말하는 앎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이야말로 이 앎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길을 걸었으며, 기적을 목격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어도 그는 예수님을 다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기대와 욕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베드로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실패와 가난을 통과한 뒤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숯불가에서 세 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충성심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에서 예수님께 알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이미 도착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다시 길을 나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적 가난은 앎의 반대가 아니라 참된 앎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가난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를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결국 그분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은 더 많은 교리를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더 깊이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더 많이 내어주고, 더 많이 허용하고, 더 많이 형제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앎"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삶으로 흘러가는 앎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우리를 점점 작아지게 합니다. 점점 가난하게 합니다. 점점 겸손하게 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을 알아 갈수록 저는 더욱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을 가까이할수록 저는 더욱 작아집니다. 당신의 사랑 안으로 들어갈수록 저는 더욱 빈손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빈손 안에서 저는 가장 풍요롭습니다. 바로 그 가난 안에서 저는 당신을 만납니다. 바로 그 앎 안에서 저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마음에 새깁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그분의 은총 안에서 자라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더 가난하게, 더 겸손하게,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원한 생명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에 받게 될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이름과 이력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알고, 그와 사랑을 나누며, 그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를 삶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얼굴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삶으로 드러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버지를 알수록 예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앎을 관계의 체험으로 이해합니다. 가난한 이웃 안에서, 형제자매 안에서, 자연과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해 형제와 달 누이를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형제자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먼 미래의 천국 입장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머무르는 삶입니다. 내가 용서할 때, 사랑할 때, 내어줄 때,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할 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 이전에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 안에 머무시듯이, 우리도 그 사랑의 흐름 안에 참여할 때 영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끝없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오늘도 우리의 가장 평범한 관계 안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앎, 그리고 내적 가난의 길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앎은 세상이 말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고 교리를 많이 외우며 신학을 많이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앎에 이르는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길이 아니라 더 많이 비우는 길입니다. 더 많이 채우는 길이 아니라 더 많이 내어주는 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하느님을 아는 길을 내적 가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로 자신을 채웁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채우고, 자신의 옳음으로 채우고, 자신의 경험으로 채우고, 자신의 업적으로 채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득 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가득 찬 그릇에는 새로운 물이 담길 수 없듯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하느님이 머무실 자리가 없습니다. 내적 가난이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내가 가진 믿음도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재능도 내 것이 아니며, 내가 가진 시간과 생명조차 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에 속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앎이 시작됩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하느님은 무너지고,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은 더욱 깊은 신비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내가 붙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먼저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내가 사랑해서 가까이 간 분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고 계셨기에 내가 그 사랑을 발견한 것뿐이라는 것을.
내적 가난은 그래서 무지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아십니다."라는 신뢰입니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맡김입니다. "주님, 저는 비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으로 채워 주십시오."라는 열린 마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비움의 신비를 삶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유함을 버렸지만 더 깊은 부요함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지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참된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을 작게 만들었지만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앎은 머리에서 시작되지 않고 무릎에서 시작됩니다. 겸손하게 내려앉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 자리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알려고 애쓰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알려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붙잡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찾고 계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어떤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붙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형제를 만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삶이고, 자신의 상처 안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발견하는 삶이며, 작은 꽃 한 송이와 바람 한 줄기 안에서도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는 삶입니다. 이 앎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끝없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생 하느님을 알아 가지만 결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무한한 신비가 우리를 더욱 가까이 부릅니다. 더 비우게 하고, 더 내려놓게 하고, 더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내적 가난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 안에서 모든 것입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당신께서 나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사랑의 흐름 안에서 모든 피조물과 형제가 되어 살아가는 삶. 그것이 프란치스칸이 걸어가는 내적 가난의 길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 안에서 끝없이 깊어지는 영원한 앎의 여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