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9. 갈망은 마침내 사랑이 된다.
갈망의 길은 끝내 사랑의 길이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을 찾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고, 상처를 치유받고 싶으며, 삶의 방향을 알고 싶어서 기도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 걷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더 이상 하느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이 성숙하는 길이며, 프란치스칸 영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가장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갈망에서 시작하지만, 갈망은 사랑 안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라나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변하며,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로 성숙해집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가장 깊은 기적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같은 사람인데 마음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당신과 함께하는 삶'으로, '내가 중심인 삶'이 '사랑이 중심인 삶'으로 조용히 옮겨 갑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길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사랑받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었고, 세상에서 이름을 얻고 싶었으며, 기사로 칭송받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받을수록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내어주는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난은 결핍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난은 사랑이 흘러갈 공간이었습니다. 그의 낮아짐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자리를 마련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점점 단순하게 만듭니다.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오히려 하나만을 붙들게 하고, 많은 것을 경험할수록 더욱 본질로 돌아가게 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이유 없이 평화를 누리듯이,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평화를 살아갑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평화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계시는 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환경의 결과가 아니라 현존의 열매입니다.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진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살아 움직일 때 사람은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기도는 세상을 떠나는 기도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기도입니다. 참된 관상은 사람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합니다. 나환자의 상처에서, 가난한 형제의 눈동자에서, 숲을 흔드는 바람에서, 새들의 노래에서, 한 조각 빵을 나누는 식탁에서, 용서를 청하는 떨리는 목소리에서,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갈망은 더 이상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만 타오르지 않습니다. 시장에서도, 들판에서도, 병실에서도,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사랑의 불꽃은 계속 타오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세상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축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더 이상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형제와 자매가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태양을 형제라 부르고 달을 자매라 부르며 죽음마저도 자매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모든 존재 안에서 흘러가는 하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연결합니다. 사랑은 경계를 허물고 관계를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내어주시듯이, 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도 자신을 내어주며 세상과 하나가 됩니다.
이제 갈망은 더 이상 결핍의 언어가 아닙니다. 갈망은 충만의 언어가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은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다는 기쁨으로 바뀌고, 기도는 하느님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숨 쉬는 생명의 리듬이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느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찾지 않습니다. 우리의 숨결 안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의 사랑 안에서 그분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갈망은 끝난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제 그것은 결핍 때문에 생겨난 갈망이 아니라, 끝없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갈망입니다.
보나벤투라가 말한 것처럼, 이해보다 갈망이 앞서고, 갈망은 마침내 사랑으로 불타오릅니다. 그 불은 인간이 피워 올린 불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붙여 주신 하느님의 불입니다. 그 불은 우리 안의 교만을 태우고, 비교를 태우며, 경쟁을 태우고, 자기중심성을 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태워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더욱 참된 자기 자신으로 빚어 갑니다. 금이 불을 통과하며 순금이 되듯이, 인간의 갈망도 사랑의 불을 통과하며 하느님의 모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마침내 우리는 처음 보나벤투라가 남긴 권고의 뜻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은총을 구하십시오. 이해보다는 갈망을, 책보다는 기도를, 스승보다는 정배를 찾으십시오. 빛보다는 불을 찾으십시오." 그 말은 지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설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이 되시는 분이시며, 사랑은 이해를 넘어 존재 전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마지막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지막에 도달하는 덕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이끌어 온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창조도 사랑에서 시작되었고, 육화도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으며, 십자가도 사랑의 절정이었고, 부활도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그 사랑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냅니다. 빵을 떼어 나누게 하고, 상처를 감싸 안게 하며, 형제를 용서하게 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며, 모든 피조물을 축복하게 합니다.
그때 한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의 삶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하느님의 위로가 되고, 그의 침묵은 하느님의 평화가 되며, 그의 눈물은 하느님의 자비가 되고, 그의 미소는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의 현존을 옮겨 다니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복음이 되고, 하나의 성사가 되며, 하나의 살아 있는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여정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조용히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평생 갈망했던 것은 하느님이었고, 하느님께서 평생 갈망하셨던 것도 바로 우리였습니다. 이 두 갈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성령의 불 안에서 하나의 사랑이 되었으며,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의 심장 안에서 쉬지 않고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끝없는 욕망의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갈망의 역사이며, 그 갈망이 마침내 사랑으로 완성되는 은총의 역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