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지 않는 씨앗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과 형제성의 신비 안에서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45)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이 세워 놓은 높고 단단한 질서를 조용히 무너뜨립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커지라고 말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더 많이 소유하라고, 더 인정받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작아지는 길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흐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발견한 복음의 핵심 또한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위대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형제”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세상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형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의 중심에는 ‘내적 가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 가난은 단순히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외적 가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자기 자신마저 움켜쥐지 않는 자유입니다. 내 생각, 내 자존심, 내 업적, 내 의로움까지도 절대화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내적 가난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받은 존재임을 아는 투명함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인을 억누를 이유도 없습니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품 안에서 받아들여진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겸손은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자리 이동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내려와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묻던 삶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태양을 “형제 해”, 물을 “누이 물”, 흙을 “어머니 땅”이라 부른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는 피조물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존재를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연결된 형제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형제성은 단순한 공동체 생활의 규칙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관계성을 깨닫는 영적 눈입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났고, 누군가의 기다림 속에서 자랐으며,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위에서 살아갑니다. 숨 쉬는 공기조차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 전체는 이미 관계 안에서 주어진 선물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비교하게 만들고, 경쟁하게 만들며, 타인을 경계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소유하려 하고, 더 인정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높아질수록 사람은 외로워집니다. 소유할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자기 자신만 바라볼수록 영혼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의 역설을 발견했습니다. 내려갈수록 자유로워지고, 비울수록 충만해지며, 작아질수록 더 깊은 생명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 안에서 모든 존재와 형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세상 전체가 선물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이 프란치스칸적 복음의 깊이를 더욱 밝혀 줍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로 1,22)진리에 순종한다는 것은 관계의 진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혼자만 구원받는 삶이 아니라 함께 살아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깨끗해진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중심성의 탁함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타인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던 눈이 형제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이 사랑은 감상적인 친절이 아닙니다. 상대의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때로는 기다려 주고, 양보하고, 이해받지 못해도 곁에 머물러 주는 것입니다. 관계는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상처와 약함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안에서 사랑은 깊어집니다. 프란치스칸 형제성은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의 약함을 품어주는 공동체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가를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가를 배우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작은 사람만이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는 사람만이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씨앗은 작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음 안에 숲이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심겨진 살아 있는 씨앗입니다. 그 씨앗은 조용히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높아지려는 욕망 대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을, 소유하려는 손 대신 내어주는 손을, 판단하려는 눈 대신 연민의 눈을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종교적 체험 이전에,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형제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먼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짐을 함께 져 주는 순간, 외로운 이 곁에 말없이 앉아 있는 순간, 자기 옳음을 내려놓고 화해를 선택하는 순간,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작은 형제”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 안에는 복음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비워진다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생명이 흐를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장 충만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장 깊이 연결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작은 사람은 가장 넓은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오늘도 조용히 세상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