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
붙잡는 종교에서 놓아버리는 복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은 본래 죽은 뒤에야 효력을 발휘하는 내세 보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불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먼 훗날 도착할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인간의 마음과 관계와 삶 안에 스며드는 새로운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이 현재의 복음을 미래의 상벌 체계로 축소시켜 왔습니다. 살아 있는 변화의 신앙이 아니라,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계산하는 종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두려움을 관리하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원래 복음은 움켜쥐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놓아버리는 길이었습니다. 내 공로를 놓아버리고, 내 의로움을 놓아버리고, 내 우월감을 놓아버리고, 내가 중심이라는 거짓 환상을 놓아버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벌 중심의 신앙은 사람을 점점 움켜쥐게 만듭니다. 구원을 확보하려 하고,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고, 종교를 자기방어의 무기로 사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종교는 어느 순간 제국의 권력을 지켜 주고, 전쟁을 정당화하고, 돈과 탐욕을 축복하며, 집단적 에고를 강화하는 도구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원래 세상을 자유롭게 해야 할 복음이 오히려 인간을 더 두렵게 만들고 더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자유의 종교가 불안의 종교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경쟁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비교의 종교도 아니었습니다. 누가 더 구원받았는지를 판정하는 종교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거짓 자아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셨습니다. 거짓 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남보다 낫다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인정받아야 안심하고, 소유해야 안전하며, 지배해야 존재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종교 안에서도 거짓 자아는 활동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바르다.” “나는 정통이다.” “나는 선택받았다.” “나는 안전하다.” 이런 종교적 우월감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는 또 다른 에고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종교는 언제나 우리 손에 무기를 쥐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거울을 건네줍니다. 타인을 심판하라고 하지 않고, 먼저 자기 내면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누가 지옥에 갈지를 논하기보다 내 안에 얼마나 미움과 탐욕과 두려움이 살아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누가 옳은가를 따지기보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복음은 타인을 굴복시키는 힘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도 본래 이런 의미 안에 있습니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어느 날 외부에서 임의로 내리는 형벌만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어 가는가가 문제입니다. 심판은 압도적인 하느님 사랑을 경험했을 때 스스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을 때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려든 것을 보고 압도적인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사랑은 인간을 넓어지게 하고 자유롭게 하지만, 탐욕과 증오는 인간을 스스로 감옥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래서 선은 이미 그 자체 안에 상을 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이미 자유를 경험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숨결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반대로 악은 이미 그 자체 안에 벌을 품고 있습니다. 증오는 인간 영혼을 먼저 파괴하고, 탐욕은 인간을 끊임없는 결핍 속에 가두며, 교만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존재를 메마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죽어서 받는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미래의 입장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징표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는 단순한 윤리 항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흐르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존재의 향기입니다. 성령께서 도구적 존재인 나를 통해 관계 안에 선의 흘러가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로써 얻는 자유와 기쁨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흐름을 허용하는 삶입니다. 억지로 자신을 꾸며 만드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는 참자아가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허용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붙잡음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투명해지는 것입니다.
참자아는 이미 하느님 안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경쟁하려 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으로 움켜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고, 흘려보내고, 사랑이 지나갈 통로가 됩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의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거짓 자아의 집착을 내려놓고 참된 생명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결국 인간을 더 작아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자유롭게 만듭니다. 더 가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풍요롭게 만듭니다. 더 비우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충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미래의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는 사람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