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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 2

 

길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

길은 언제나 먼저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걸어가며 남긴 흔적이 길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길을 편안히 걷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남기신 발자국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발을 올려놓는 일입니다. 그 발자국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이어져 있고, 언제나 가난한 자리로 향해 있으며, 언제나 누군가의 눈물 곁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그래서 따름은 방향을 선택하는 일이기보다 자신의 무게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걸어가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밀어 넣지 않으시고 끌어당기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돌아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원하면이 한 마디 안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강요하지 않으시는 사랑, 기다리시는 사랑,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는 사랑. 그래서 따름은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 앞에서 비로소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스스로 내어주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 눈을 배웠습니다. 그는 나병환자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몸서리치며 도망쳤지만, 다시 돌아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순간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눈의 변화가 그의 삶 전체를 바꾸었습니다. 따름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 머물되 세상의 방식으로 살지 않는 것, 소유하지 않으면서 존재하고 지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며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빛나는 것, 이것이 복음의 길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 길을 작아짐이라고 부릅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자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하느님의 흐름이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하느님의 사랑도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사람만이 그 흐름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끊임없이 시작하는 일입니다. 이미 충분히 걸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이미 도달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멈추어 버립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임종의 순간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으니 이제 우리는 다시 시작합시다.” 따름은 완성의 언어가 아니라 시작의 언어입니다. 어제의 열심히 오늘을 대신할 수 없고, 과거의 은총으로 지금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다시 길 위에 서야 합니다.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서 떼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던 것들, 우리의 확신, 우리의 의로움, 우리의 안전, 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손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가벼워집니다. 붙잡고 있을 때는 몰랐던 자유가 놓아버릴 때 시작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관계입니다. 그분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선이 흐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길 위에 제대로 서 있는 것입니다. 흐름이 멈추는 곳에는 언제나 자만심이 있습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충분하다” “나는 옳다이러한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사랑의 흐름은 막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따름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작업입니다. 낮아질수록 더 많은 것이 흐르고, 더 깊은 생명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다.” 그 길은 어딘가에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관계입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그 손을 느끼며, 길을 잃으면 다시 불러 주시는 그 음성을 들으며, 때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그분이 앞서 가신다는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입니다. 결국 따름은 자기를 잃는 길이 아니라 참된 자신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다가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길 위에서 우리는 점점 더 그분을 닮아가고, 마침내 그분 안에서 자기 자신이 됩니다. 오늘도 길은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길, 그러나 이미 시작된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주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십니다. 말씀으로가 아니라 흔적이 있는 발자국으로. 그러므로 제자는 생각하는 사람이기 전에 따라 걷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그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얹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과 제자됨의 영성

따르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뒤를 물리적으로 따라가는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앞서간 이가 남겨 놓은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걸음을 옮겨 놓듯, 그의 뒤를 그대로 따라 걷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낱말은 또한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나, 동반하며 함께 걷는다는 뜻도 지닙니다. 더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든 열성과 정성을 다하여 한 실재를 끈질기게 추구하고 표현하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따르다는 동사는 본질적으로 어떤 인격을 향한 긴장과 지향을 품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름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떠나는 실존적 태도를 뜻합니다. “따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길 위에 서는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수도생활 신학은 복음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면서, 수도생활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따름이라는 낱말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수도생활이 단순히 어떤 제도적 틀이나 규칙의 준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뒤따르는 복음적 삶의 여정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따름은 외적인 형태보다 먼저 내적 지향을, 이미 얻은 상태보다 지금도 계속 걸어가고 있는 길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따름은 스승의 발걸음 위에 자신의 발걸음을 놓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근본적인 모습들을 자기 삶 안에 익혀 가는 생생한 실존적 과정입니다. 자기 자신과 타인, 우주와 아버지 하느님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방식과 관계 맺으셨던 태도를 몸으로 배워 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따름은 예수님의 관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성부께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그분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기 생각의 중심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점차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존재하려는 사람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주도권은 언제나 제자에게 있지 않고 스승에게 있습니다. 먼저 부르시는 분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그 부르심에 응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는 결코 강요가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네가 원하면이라는 자유의 문을 열어 두십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름은 억압된 복종이 아니라 자유로운 응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초대 앞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단하며,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바로 그때 비로소 참되게 스승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자유롭게 걷기 시작할 때, 인간은 비로소 제자가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따름은 대단히 역동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번의 결심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전체와 전인격이 끊임없이 참여하는 살아 있는 여정입니다. 이 여정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지속적인 긴장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긴장은 그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영으로 육을 극복하도록 요구하며, 세상을 떠나라는 요청이 아니라 세속의 논리를 넘어서도록 부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을 버리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머물되 세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속의 욕망과 가치관에 예속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따름은 세례 때 그리스도인이 서약한 바를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세속과 그 유혹을 끊어 버리고, 복음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날마다 현실로 만드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따름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그것은 끝없는 여정이며, 언제나 더 걸어가야 할 길로 남아 있습니다. 어제의 열심이나 과거의 결단만으로 유지될 수 없고, 오늘 다시 선택하고 오늘 다시 응답해야 하는 살아 있는 길입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시작의 태도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말한 회개의 삶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회개란 단지 죄를 뉘우치는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서기 위하여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하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곧 회개는 과거를 정리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복음을 선택하며 다시 그리스도를 따르기 시작하는 존재의 방향 전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따름은 프란치스칸 정신 안에서 곧 회개의 삶이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복음적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먼저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길을 걷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따름은 예수님의 뒤를 좇는 외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관계를 맺으며, 그분의 길을 자기 존재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전인격적 변형의 여정입니다. 그것은 떠남이면서도 더 깊은 만남이고, 포기이면서도 더 충만한 자유이며, 끝없는 시작이면서도 점점 더 분명해지는 방향성입니다. 제자는 이미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의 음성을 듣고 오늘도 다시 길 위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 위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참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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