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Navigation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신비 안에서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실재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위에는 손에 쥔 것이 아니라 비워진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 은총이 흐르고, 그 은총은 언제나 누군가를 통해우리에게 도착합니다. 나는 그 길의 한가운데에 서서 오늘도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나를 흔들어 놓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오래된 복음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그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는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선언. 그 말씀은 내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묻기 전에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내 안의 많은 것들이 무너집니다. 판단하려는 습관, 소유하려는 욕망, 내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들. 그 모든 것이 하나씩 손에서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비로소 프란치스칸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유와 겸손,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 이것이 내적 가난의 기초들입니다. 내적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워질 수 있고, 쥐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흘러갈 수 있으며,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자리. 그래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머물다 가도록 허락하는 여백이 있습니다. 그 여백 속으로 낯선 이가 들어오고, 그 낯선 이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이 조용히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때, 관계는 더 이상 거래가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입니다. 그는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의 가난은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었고, 관계의 회복은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하여 많이 비워진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남들이 나에게 붙여준 딱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상실이 아니라 모든 것을 형제로 부를 수 있는 놀라운 자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법을 배웠고 죽음을 앞둔 몇 년 동안은 자유롭기 위하여 가난을 선택하셨습니다. 형제 태양, 자매 달,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까지. 그는 모든 존재를 맞아들이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가난한 자리로, 비워진 마음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안을 비웁니다. 조금 더 판단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소유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나 자신을 비우기 위해,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해. 그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서 한 사람을 다시 만납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하고, 여전히 나와 다르며,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이제 압니다. 그를 통해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 이미 와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문을 엽니다. 내 마음의 문을, 내 시간의 문을, 내 존재의 문을. 그리고 그 문을 지나 하느님이 들어오십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렇게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는 오늘도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가난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마음,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손,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사랑. 그 가난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얻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13, 20.)

 

파견은 사건이 아니라 흐름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구조(성부 성자 제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제자들은 다시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 우리는 단순히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통과하는 통로이며 도구들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내가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이고, 손을 내밀 때 그 만남은 이미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관계의 연장선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들립니다. “너를 통해 내가 간다.”

 

맞아들임은 감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조건으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나를 존중하는가? 나와 맞는가?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보다 그를 통해 누가 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맞아들임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불편한 사람 안에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 안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타인 안에서도, 그 사람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자리인 일상의 관계에서

이 말씀은 특별한 선교 상황보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말을 건네는 가족, 함께 일하는 동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이, 이 모든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파견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뀝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이며 관계의 질은 신앙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결국 신앙은 성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음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안에서 나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의 태도를 보고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파견된 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한 방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얼굴로 가고 있는가? 나를 통해 하느님이 드러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 드러나고 있는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은 하느님이 서로를 찾아가시는 사건이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이 편안한 사람이든, 불편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 지금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고 계신다.” 그 순간, 관계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생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이는 피해야 합니다. 맞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폭력과 파괴로, 말과 행동으로 관계를 해치는 이들은 조심성 있게 멀리 해야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는 대상들은 우리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위에는 손에 쥔 것이 아니라 비워진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 은총이 흐르고, 그 은총은 언제나 누군가를 통해우리에게 도착합니다. 나는 그 길의 한가운데에 서서 오늘도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나를 흔들어 놓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오래된 복음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그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는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선언. 그 말씀은 내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묻기 전에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내 안의 많은 것들이 무너집니다. 판단하려는 습관, 소유하려는 욕망, 내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들. 그 모든 것이 하나씩 손에서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비로소 프란치스칸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유와 겸손,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 이것이 내적 가난의 기초들입니다. 내적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워질 수 있고, 쥐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흘러갈 수 있으며,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자리. 그래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머물다 가도록 허락하는 여백이 있습니다. 그 여백 속으로 낯선 이가 들어오고, 그 낯선 이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이 조용히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때, 관계는 더 이상 거래가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입니다. 그는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의 가난은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었고, 관계의 회복은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하여 많이 비워진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남들이 나에게 붙여준 딱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상실이 아니라 모든 것을 형제로 부를 수 있는 놀라운 자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법을 배웠고 죽음을 앞둔 몇 년 동안은 자유롭기 위하여 가난을 선택하셨습니다. 형제 태양, 자매 달,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까지. 그는 모든 존재를 맞아들이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가난한 자리로, 비워진 마음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안을 비웁니다. 조금 더 판단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소유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나 자신을 비우기 위해,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해. 그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서 한 사람을 다시 만납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하고, 여전히 나와 다르며,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이제 압니다. 그를 통해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 이미 와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문을 엽니다. 내 마음의 문을, 내 시간의 문을, 내 존재의 문을. 그리고 그 문을 지나 하느님이 들어오십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렇게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는 오늘도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가난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마음,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손,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사랑. 그 가난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얻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13, 20.)

 

파견은 사건이 아니라 흐름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구조(성부 성자 제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제자들은 다시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 우리는 단순히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통과하는 통로이며 도구들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내가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이고, 손을 내밀 때 그 만남은 이미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관계의 연장선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들립니다. “너를 통해 내가 간다.”

 

맞아들임은 감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조건으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나를 존중하는가? 나와 맞는가?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보다 그를 통해 누가 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맞아들임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불편한 사람 안에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 안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타인 안에서도, 그 사람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자리인 일상의 관계에서

이 말씀은 특별한 선교 상황보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말을 건네는 가족, 함께 일하는 동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이, 이 모든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파견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뀝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이며 관계의 질은 신앙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결국 신앙은 성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음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안에서 나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의 태도를 보고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파견된 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한 방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얼굴로 가고 있는가? 나를 통해 하느님이 드러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 드러나고 있는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은 하느님이 서로를 찾아가시는 사건이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이 편안한 사람이든, 불편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 지금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고 계신다.” 그 순간, 관계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생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이는 피해야 합니다. 맞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폭력과 파괴로, 말과 행동으로 관계를 해치는 이들은 조심성 있게 멀리 해야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는 대상들은 우리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자유나눔 게시판

자유롭게 글을 남겨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신비 안에서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실재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신비 안에서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실재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위에는 손에 쥔 ... new 이마르첼리노M 2026.04.30 6
1832 빛과 친밀함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며드는 연인의 언어 빛과 친밀함은 영원한 생명으로 스며드는 연인의 언어   빛으로 오신 분, 관계로 드러나는 하느님 “나를 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본다”는 선언은, 단순한 신... 이마르첼리노M 2026.04.29 19
1831 신뢰의 강물로 흐르는 목자의 손길 신뢰의 강물로 흐르는 목자의 손길   신앙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내 안을 관통하여 흐르는 거대한 강물을 신뢰하는 능력입니다. 그 강물은 정지해 있는 고인 ... 이마르첼리노M 2026.04.28 29
1830 착한 목자의 사랑과 우리 일상의 영적 가치 착한 목자의 사랑과 우리 일상의 영적 가치 (요한 10,11-18)   착한 목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한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하느... 이마르첼리노M 2026.04.27 41
1829 문이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문이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0장 9절–10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문이자 참된 목자로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소속... 이마르첼리노M 2026.04.26 40
1828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유형의 사람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유형의 사람   오늘은 우리의 관계에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유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곁에 두기만 해도 마음의 에너지를 앗아가는 ... 이마르첼리노M 2026.04.22 61
1827 믿는 사람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 믿는 사람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 40.)   '영원한 ... 이마르첼리노M 2026.04.22 57
1826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깊은 계시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백성들은 다시 배가 고팠고, 세상... 이마르첼리노M 2026.04.20 75
1825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일은 믿음으로 열리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이... 이마르첼리노M 2026.04.20 59
1824 “나다 두려워 말라” 가장 힘 있는 위로 “나다 두려워 말라” 가장 힘 있는 위로   풍랑 위를 걸어오시는 이름 살다 보면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밤을 만납니다. 낮에는 견고하던 마음이 저... 이마르첼리노M 2026.04.18 58
1823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도구적 존재’의 길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도구적 존재’의 길   요한복음 6장과 성체성사 요한복음 6장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나 교리 설명을 넘어, 그리스도교 신앙... 이마르첼리노M 2026.04.18 44
1822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 2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 2   길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 길은 언제나 먼저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걸어가며 남긴 흔적이 길이 됩니다. ... 이마르첼리노M 2026.04.17 57
1821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 1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를 것인가 1   육화, 성체, 수난 안에서 드러난 복음적 가난과 사랑 프란치스코 성인의 묵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단순한 교리적... 이마르첼리노M 2026.04.16 64
1820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 (시 96,11)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 (시 96,1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셔서, 그를 ... 이마르첼리노M 2026.04.15 50
1819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과 위로부터 새로 태어남.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과 위로부터 새로 태어남.   요한 복음 3장 5절에서 8절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 가운데 드러나는 핵심적인 계시입니다. 이 말씀은 단... 이마르첼리노M 2026.04.13 94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3 Next ›
/ 123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