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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령이 아니라 존재의 초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

 

이 말씀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윤리적 권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존재 전체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며, 하느님의 생명이 인간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감정으로 이해합니다. 좋아하는 마음, 끌림, 따뜻함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감정 이전에 존재를 내어주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햇빛이 자신을 아끼지 않고 대지 위에 쏟아지듯, 강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 사랑은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흘려보내는 생명의 운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극적인 죽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시간을 내어주는 것, 상대의 느린 걸음을 기다려주는 것, 상처 입은 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내 자존심보다 관계를 먼저 선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이미 작은 죽음이며 작은 부활입니다.

 

사랑은 늘 내 중심성을 조금씩 내려놓게 만듭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내 방식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 인정받고 싶은 욕망, 상대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 흐를 공간을 허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의 사랑은 지배가 아니라 허용입니다.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자기답게 살아나도록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친구란 단순히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을 나누는 존재입니다.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짊어지는 존재입니다. 상대의 숨결 안에 자기 삶의 일부를 맡겨둘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그렇게 대하십니다. 억지로 복종시키는 통치자가 아니라, 함께 길을 걷고 싶어 하시는 벗으로 다가오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한 인간과 친밀해지기를 바라신다는 것. 우리의 식탁에 앉으시고, 우리의 눈물을 만지시며, 우리 삶의 가장 작은 자리까지 들어오기를 원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새 계명은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길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용서할 때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서 숨 쉬고, 기다려줄 때 하느님의 인내가 우리 안에서 자라며, 내어줄 때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결국 사랑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 존재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닫혀 있던 사람이 열리고, 두려움 속에 움츠러들던 사람이 타인을 향해 걸어가며, 소유하려던 사람이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금씩 하느님의 친구가 되어 갑니다. 사랑은 거창한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 상처 난 사람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 일, 말 한마디에 품위를 담는 일, 홀로 외로운 사람 곁에 조용히 머물러 주는 일. 그 작은 사랑들이 모여 세상을 다시 살게 하는 복음의 빛이 됩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은 결국 사랑하라는 요구 이전에 먼저 사랑받고 있음을 믿어라는 초대입니다우리가 바뀌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조금씩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뽑힘의 은총, 남아 있는 사랑의 열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 15,16-17) 이 말씀 앞에 서면, 신앙은 먼저 내가 하느님을 찾아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먼저 바라보시고 부르신 이야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훌륭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내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나보다 먼저 나를 준비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뽑아 세우신 이유는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사랑이 흘러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파견입니다. 부르심은 소유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생명이 되고 선의 흐름이 되도록 살아갑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남아 있는 열매란 화려한 업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존중한 말 한마디, 지친 이를 포기하지 않은 기다림, 상처받은 사람 곁에 조용히 머문 침묵, 미워할 수 있었지만 용서로 방향을 바꾼 마음, 나를 드러내기보다 선이 지나가도록 자신을 낮춘 하루가 바로 남아 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오래 남습니다. 힘으로 이긴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사랑으로 품은 것은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남습니다. 말은 멀리 가고, 행동은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한 작은 일은 하느님의 기억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결국 모든 부르심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모든 사명은 사랑으로 검증됩니다. 모든 열매는 사랑 안에서만 오래 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까닭은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특별한 사랑이 세상 안에 머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뽑힌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높아지는 삶이 아니라 낮아지는 삶입니다. 앞서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입니다.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삶입니다. 내가 선택한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으로 불러오신 주님의 길입니다. 주님! 저희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열매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는 선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저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당신께서 저희를 뽑아 세우신 뜻이 오늘의 일상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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