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심층에서 읽는 마태복음 25장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이 말씀이 주는 위로와 가르침은 세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가치는 세상이 매기는 기준(부, 명예 등)과 상관없이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귀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둘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배려가 실제로는 가장 큰 선행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타인을 대할 때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인가'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관계의 심층에서 읽는 마태복음 25장
마태복음 25장은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형제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묻습니다. 관계의 깊은 층위에서 세 가지 질문은 나는 깨어 있는가?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릴 만큼 민감한가?) 나는 맡겨진 사랑을 사용하고 있는가? (두려움 때문에 묻어두지 않았는가?) 나는 작은 이를 통해 오시는 그분을 알아보는가?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가?)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하늘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나병환자의 상처 안에서 찾았습니다.마태복음 25장은 프란치스칸 영성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작음, 가난, 형제성, 실천적 자비, 나에게서 내가 해방된 자유 안에서 경험하는 기쁨에 찬 가난과 겸손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 부드러워질 때, 바로 그 자리가 최후의 심판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종말론이 아니라 관계론입니다. 미래의 심판이 아니라, 오늘의 응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오늘 만난 가장 불편한 사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가장 이해되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당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방문’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이 이미 영원을 품고 있는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당신과 내가 마주한 얼굴 안에서 이미 시작된 심판과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관계의 심연에서 울리는 말씀으로 마태복음 25장을 따라 걸어가 봅니다.
밤이 깊어지면 사람의 얼굴은 사라지고, 목소리도 희미해지며, 남는 것은 마음의 온도뿐입니다. 관계란 결국 온도의 문제임을 나는 늦은 밤에야 깨닫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하늘이 갈라지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심판의 장면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가장 소박한 자리, 기다림과 맡김과 만남이라는 세 가지 숨결로 우리의 관계 깊숙한 곳을 건드립니다. 꺼지지 않는 등불, 묻어둔 사랑, 가장 작은이를 대하는 태도, 현재는 심판의 시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보여 줍니다.
1, 깨어 있음, 꺼지지 않는 등불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해받기를 기다리고, 존중받기를 기다리고, 먼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종종 불평으로 변합니다. 왜 아직 오지 않느냐고, 왜 나만 준비해야 하느냐고, 왜 저 사람은 변하지 않느냐고. 열 처녀의 비유는 종말의 공포를 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계의 어둠 속에서 내 등불이 꺼졌는지 묻는 이야기입니다. 기름은 사랑의 인내입니다. 상대의 서툼을 견디는 힘, 상처받았어도 다시 말을 건네는 용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따뜻하려는 의지. 그 기름은 빌릴 수 없습니다. 타인의 신앙도, 타인의 열정도, 타인의 헌신도 나 대신 사랑해 줄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의 무심한 한 마디에 내 등불은 얼마나 쉽게 꺼져버렸던가? 그러나 주님은 묻습니다. “네가 기다리는 동안, 네 마음은 따뜻했느냐?”
2. 맡겨짐, 묻어 둔 사랑에 대하여
달란트는 재능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주인은 종을 믿고 떠났습니다. 계산서를 남기지 않고, 감시자를 두지 않고. 관계 안에서 우리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달란트를 맡깁니다. 비밀을 맡기고, 상처를 맡기고, 연약함을 맡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혹시 상처받을까 봐, 혹시 이용당할까 봐, 혹시 실패할까 봐. 그래서 사랑을 묻어 둡니다. 먼저 말하지 않고, 먼저 손 내밀지 않고, 먼저 사과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를 묻은 종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상처받기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두려웠습니다.” 그 고백은 우리 마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관계가 두려운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용서는 손해처럼 보이고, 화해는 체면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러나 묻어 둔 사랑은 결국 굳어버린 땅이 됩니다. 주님은 묻습니다. “네가 받은 사랑을, 어디에 묻어 두었느냐?”
3. 만남, 가장 작은 얼굴에 대하여
그리고 마침내 장면은 단순해집니다.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낯선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 놀랍게도 심판의 기준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지, 얼마나 많은 신학을 알았는지, 얼마나 열심히 봉사했는가가 아니라, 눈앞의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는지 묻습니다. “너희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는 묻습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을 보았습니까?” 그 질문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 내가 외면한 사람 안에서, 오늘 내가 판단한 사람 안에서, 오늘 내가 귀찮아한 사람 안에서 주님은 조용히 서 계셨습니다. 관계의 심층에는 늘 작은 이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얼굴을 밀어내면 하느님도 밀려납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늘이 열립니다.
4. 심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내 말투 안에서, 지금 내 시선 안에서, 지금 내 침묵 안에서 이미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심판은 누군가를 벌주는 사건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빛입니다. 관계 안에서 나는 따뜻해졌습니까, 아니면 차가워졌습니까? 사랑은 나를 넓혔습니까, 아니면 두렵게 만들었습니까? 나는 깨어 있었습니까? 나는 맡겨진 사랑을 사용했습니까? 나는 작은 얼굴 속에서 그분을 알아보았습니까?
5. 마지막 장면은 놀랍도록 조용합니다
천둥도, 번개도 없습니다. 다만 한 문장만이 남습니다. “와라.” 혹은 “가라.”입니다. 그 차이는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관계의 태도였습니다. 오늘 내 곁에 있는 가장 작은 이, 가장 불편한 이,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이. 그가 나의 종말입니다. 그가 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나의 구원입니다. 밤이 깊어 다시 고요해질 때, 나는 묻습니다. 오늘 내 등불은 따뜻했는가. 오늘 나는 사랑을 묻지 않았는가. 오늘 나는 작은 얼굴을 밀어내지 않았는가. 마태복음 25장은 하늘의 문을 열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나는 네가 사랑한 만큼, 네가 받아들인 만큼, 네가 내어준 만큼 이미 너 안에 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