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오늘 복음의 말씀 중에서 두 가지 단어 곧
“그러자”와 “그래서”가 눈에 특히 들어왔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그래서’ 투덜거리는데
레위는 ‘그러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공동체에는 항상 이런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깨는 부류와
공동체를 건설하는 부류입니다.
투덜이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주님께서 뭘 가르치셔도,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셔도 주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형제들에게 투덜거리며 더 나아가 쫓아냄으로써 공동체를 깹니다.
이들의 시선은 주님께 가 있지 않고,
늘 다른 사람에게 가 있으면서 불평불만하고,
단죄하고, 쫓아내기만 함으로써 공동체를 깹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단죄하며 공동체에서 쫓아낸 이들을
주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고 도구 삼아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러자 그는 즉시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보이는 자세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의 첫 제자들이 그러했고
프란치스코도 그러했음을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환희에 넘쳐 방금 들은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러 댔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
이리하여 그는 산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께서 “가서, 무너져 가는 내 집을 고쳐라.”
라고 하신 말씀을 완수하게 되고 오늘 독서가 얘기하는 ‘복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복구는 선행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며,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고 죄인 아닌 사람 없습니다.
다만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아는 죄인이 있고
단죄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회개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단죄하는 죄인은 그럼으로써 공동체를 깨는 데 비해
회개하는 죄인은 주님의 부르심 받은 레위가 다른 죄인들도
주님의 식탁에 초대하듯 죄인들의 회개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이 사순 시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회개의 공동체로 부르시며 죄인일지라도
같은 죄인에 대한 연민으로 사랑할 줄 아는 죄인이 되라 부르시는데,
‘그러자’ 즉시 주님을 따르는 우리입니까? 내일로 미루는 우리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