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기가 없는 나라에서 누리는 자유
인과응보의 계산을 넘어, 존재 그 자체를 향한 창조적 사랑에 참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 자유를 맛봅니다. 인과응보를 넘어 창조적 사랑으로 가는 영적 자유의 여정과 프란치스칸 길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관점이 우리 삶을 가로지릅니다. 하나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의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하므로 사랑한다”는 창조의 질서입니다. 인과응보는 분명 공정해 보입니다. 노력하면 얻고, 잘못하면 잃는다는 이 논리는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 틀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우리는 관계를 계산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해야 하고, 내가 상처받았으니 너도 그만큼 아파야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사랑은 거래가 되고 용서는 흥정이 되며 자비는 조건부 계약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시선은 전혀 다른 차원에 서 있습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사람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인과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빛을 주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비가 누구에게 자격이 있는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관점은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존재하기에 이미 사랑받는다.” 이 사랑은 무상성입니다. 값없이 주어지고 조건 없이 쏟아지는 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결과로 보지 않으십니다. 실패의 목록으로 정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다시 시작하시는 창조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초대입니다.
창조의 관점에 따라 나를 움직이는 힘을 살펴보면 자유와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됩니다. 인간 안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두려움은 잠시 사람을 몰아붙이지만 자유는 오래 사람을 이끕니다. 우리는 무엇에 끌려 선택합니까? 의지를 움직이는 북극성은 의미와 가치입니다. 세속적 가치는 ‘나를 중심’에 두고 계산합니다. 그러나 복음적 가치는 ‘사랑을 중심’에 둡니다. 복음적 선택은 나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참여하는 결정입니다. 그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관계를 살리는 쪽을 택하는 자유입니다. 억지로 참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알기에 기꺼이 내어주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살리는 선의 구체적 현장에서는 너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복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현장입니다. 그 현장은 거창한 무대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식탁이며 수도원의 복도이며 가정의 부엌입니다. “너의 마음을 헤아려 말없이 필요를 채우는 것.” 이 한 문장은 창조적 사랑의 압축된 복음입니다. 헤아림은 공감입니다. 상대의 말 뒤에 숨은 두려움을 읽는 일입니다. 말없음은 겸손입니다. “내가 해주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채움은 실천입니다. 실제로 손을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인과응보의 세계에서는 “왜 내가?”라고 묻습니다. 창조적 사랑의 세계에서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선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 차이가 영적 자유를 가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분은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억울한 상황에서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평화를 택할 때, 오해받았을 때 자기 변명을 내려놓고, 상대의 상처를 먼저 살필 때, 그 자리에서 창조는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 순간 인과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선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창조적 사랑입니다.
인과의 틀은 우리를 계산하게 합니다. 창조의 시선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상대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보상받지 않아도 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의미는 이미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하지 않고 이미 사랑받았기에 사랑합니다. 그 자리에서 부산물로써 평화가 태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누군가는 인과응보의 무게에 눌려 있을지 모릅니다. 자격과 실패와 비교 속에서 자신을 재단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그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필요를 채워주는 작은 손길. 그것이 창조의 참여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관계 안에서 선의 흐름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그 창조의 흐름에 동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티모테오 2서 1,9) 이 말씀은 인과응보의 세계를 부드럽게 뒤흔듭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묻습니다. “나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나는 충분히 잘 살았는가?” 그러나 복음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은 왜 나를 부르셨는가?” 인과의 세계에서는 선행이 원인이고 구원이 결과입니다. 그러나 은총의 세계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이고 우리의 삶은 그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거룩함은 보상 체계가 아닙니다. 성취 목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목적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드러나는 것, 자비가 흘러가는 것,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업적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통로가 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회심을 공로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은총이라 불렀습니다. 은총은 우리가 잘해서 오는 보상이 아니라 잘하지 못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지속적인 선택입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그분은 목적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그분의 계획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완벽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은총에 계속 머무는 태도입니다. 거룩함은 관계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목적은 우리를 세상 밖으로 도피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 안에서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상황에서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할 때 인정받지 못해도 선을 멈추지 않을 때, 계산하지 않고 필요를 채워줄 때 그 순간 우리는 행실의 점수표가 아니라 은총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특별한 분위기가 아니라 관계의 한복판에서 자비를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목적을 아는 사람의 자유는 해방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나에게서 나를 빼내는 데 자유를 사용합니다. 목적을 모르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목적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이미 불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패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부름 받은 존재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가 참된 평화를 낳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하느님이 얼마나 먼저 사랑하셨는가입니다. 우리는 공로의 사다리를 오르는 존재가 아니라 은총의 품 안에서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그 부르심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우리의 행실을 넘어 하느님의 목적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