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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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이미 간음을 행했다
주님께서는 ‘욕망을 품는 자는 누구나 간음한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산에 혼자 앉아 있더라도 욕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다.” (마태 5,28 참조)
이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오로지 음욕만을 품고서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이는, 자신의 평온한 생각 속에 맹수가 침입해 들어오도록 스스로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침입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방종에서 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미 이렇게 경고합니다.
“남의 아내의 아름다움을 유심히 바라보지 마라.” (집회 9,8)
이는 처음부터 그런 태도를 꾸짖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라보기는 했지만 빠지지는 않았소”라며,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다가 죄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예수님께서는 그런 눈길 자체가 벌받을 일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바라보긴 했고, 사실 욕망도 품었지만, 죄는 전혀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간음자입니다. 입법자이신 주님께서 그렇게 단호히 말씀하셨고, 그것을 따지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한 번, 두 번, 또는 세 번 바라볼 때는 죄를 삼갈 힘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대 안의 욕망의 화덕에 불이 지펴지면, 그대는 틀림없이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대의 인성은 다른 사람들의 인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가 아직 다치지 않았더라도 그를 꾸짖고 때리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실제로 그런 짓을 저지르기 전에, 행동이 이루어지기 전에 음탕한 눈길을 미리 잘라내십니다.
일단 불을 지핀 사람은, 자신이 마음에 둔 여자가 자기 앞에 없을 때에도, 그 부끄러운 행위를 끊임없이 눈앞에 그리게 됩니다. 그런 상상은 실제로 행동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불륜조차 미리 잘라버리십니다.
—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하나가 되고 단순하실 때만, 하느님은 내가 ‘영혼의 성’이라고 부르는 이 하나 속으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이것 외에 달리 거기로 들어가실 방도는 없습니다. 오로지 이 방법으로만 하느님은 거기로 들어가서 머무르실 수 있습니다.
영혼이 하느님과 대등해지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 부분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은 진실입니다. 나는 목격자로서, 나의 영혼과 진리를 걸고서 이것을 보증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도 그러한 '성(城)'이 되기를!
내가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서 그곳에 들어오셔서 영접을 받으시고, 영원히 머무르시기를!
아멘.
주석: 참 포도나무는 실로 어떤 일을 하는가?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영성의 완성은 ‘관상(contemplation)’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곧 사랑과 진리의 열매, 내적 자유의 열매—야말로 참된 영적 상태의 신뢰할 만한 표지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야말로 자기 사랑을 버린 결과이며,
버리고 그대로 둠으로써 맺어지는 영의 열매입니다.”(406)


<금주간 성서읽기> 마르 10-13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를 원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이제부터 금욕의 삶을 살기 위해 과부가 되기를 원하며, 또 어떤 사람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절제된 삶을 원합니다. 설사 이들 중 어느 한 특정한 것이 객관적으로 더 낫다고 하더라도, 이 경우에는 이들 중에 현명하지 못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의 열매로 아이들을 낳아 그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원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과부가 되어 절제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이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비록 앞으로 재혼을 할 생각이 없어 아이를 더 이상 낳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도, 이전에 낳은 아이들이 건강하고 풍족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처녀는 이러한 모든 걱정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갖고 있고 이들이 풍족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고 정당한 것입니다 만약 이들 자신과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은 조건의 풍족한 삶을 성취했다면, 우리는 이들을 이미 행복한 사람들로 칭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성취한 것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다른 종류의 더 크고 더 좋으며 더 유익하고 더 인정받을 수 있는 풍부한 것들을 가지지 않으면, 이들은 아직도 행복한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