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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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우리의 도움이신 주님이 계신데, 우리에게 왜 지팡이의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거의 빈손에, 헐벗은 상태로 파견하셨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의 처지가 무척 어려워 보였으므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 엄격한 명령을 다소 누그러뜨리십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필요한 음식과 옷만 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1티모 6,8)
사도는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좋은 것을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갈라 6,6)
이 말씀은, 영적 결실을 추구하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물질적 자원을 스승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초대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승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승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열두 제자들이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구리 돈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서, 금은 감정을, 은은 말씀을, 구리 돈은 목소리를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아서는 안 되며, 오직 주님께서 주신 것만을 지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단자와 철학자들의 가르침이나 엉터리 교리를 받아들여서도 안 되며, 세상의 걱정으로 짓눌려서도, 두 얼굴을 지녀서도, 치명적인 사슬에 두 발이 묶이게 두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땅 위를 걸어 나아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지녀서도 안 되며(탈출 4,3 참조), 육적인 것에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지팡이나 막대기는 갈대와 같습니다. 조금만 기대어도 금세 부서져서 우리 손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 히에로니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나는 종종 영 안에는 홀로 자유로운 능력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나는 영 안에 은신처가 있다고도 말했고, 영의 빛, 내지 작은 불꽃이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그것을 가리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땅보다 높듯이, 그것은 이러저러한 것보다 훨씬 고귀한 무엇입니다. 나는 이제 과거에 그것에 이름을 붙였던 것보다 더 고귀한 방식으로 이름을 붙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이름 붙이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러한 고귀한 방식마저도 무시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러한 방식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형태도 없고, 완전히 자유롭고, 텅 비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이 자신 안에서 자유롭고 텅 비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이자 단순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하나이자 단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그것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씀드린 바로 이 능력 속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신성과, 자신 안에 계신 성령과 더불어 완전히 하나가 되시고, 꽃을 피우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 능력 안에서도 외아들을 낳으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실로 이 능력 안에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도 아버지와 협력하여 외아들을 낳고, 자신을 외아들로서 낳으며, 이 빛 속에서 몸소 외아들과 진리가 됩니다.
여러분이 나의 진심을 알기만 한다면, 내가 말하고 있는 것도 잘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말은 진실이고, 진리 자체가 그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405)


<금주간 성서읽기> 마르 10-13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3절: 르네상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르네상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1455)와 더불어 르네상스가 로마에 들어왔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고, 고귀하고 학식이 있는 인문주의자이고, 바티칸 도서관의 설립자였다. 그는 터키인에 대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갈리스토 3세(1455∼1458)도 터키인에 대항할 십자군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친족인 스페인계 보르지아 가문에 대한 77세의 이 교황의 끝없는 사랑은 두 명의 조카를 추기경단에 받아들이도록 유혹하였는데, 그중의 하나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로데리고 보르지아라는 후의 알렉산데르 6세이다.
본명이 에네아 실비오 데이 피콜로미니인 비오 2세(1458∼1464)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다. 40세가 되기까지 그는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궁정에서 비서로 지내면서 인문주의자들 방식을 따라 단정치 못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후회하고
사제가 되었으며, 트리엔트 주교가 되고 마침내 교황이 되었다. 그의 개혁 노력에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비난하자, 그는 「철회 칙서」(1463)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고백하며, 에네아를 물리치고 비오를 받아들여라” 라고 간청하였다. 터키인으로 인한 위급함이 그의 개혁안을 실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에게는 바오로 2세(1464∼1471)처럼 족벌주의가 없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회의 총장을 역임한 식스토 4세(1471∼1484)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수도회에 특전을 많이 주었다.
그는 족벌주의를 제도로 교회정치에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교회정치에서 17∼18세기까지 고정적으로 채용되었다.(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