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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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사랑이 모든 행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시라면, 사랑이 없을 경우, 영광스러운 은총의 선물들 - 더없이 숭고한 권능들과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믿음 자체와 계명들-의 가장 효과적인 작용도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몹시 두려워해야 합니다. … 사랑이 없다면 (법규들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은총의 놀라운 표징을 행하더라도) 그 일들은 부정한 행위로 여겨질 것입니다 ... 그것을 행한 이들의 목적이 자신의 뜻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9
버림의 열매는 지혜와 불타는 사랑이지 억압이 아니다
얘야, 일어나거라(루카 8,54).
그렇다면 버림과 그대로 둠의 열매는 돌처럼 차가운 사람, 얼어붙은 대인 관계, 굳어 버린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정열과 열정일 것이다. 열정은 행위를 낳고, 행위는 깊고 내밀한 사랑, 곧 성령의 사랑에서 태어나서, 생명을 회복시킨다. 이는 마치 행위의 원천이 생기를 받아서 깊은 잠과 죽음의 땅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하느님과 영혼이 하나가 되면, 영혼은 최초의 순결, 곧 자신의 신적인 근원에 이르기 위해 애를 쓴다. 엑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순결한 영들이 하느님의 순결에 이르는 길을 따라 되돌아 가고 있다." 우리의 순결이기도 한 이 ”하느님의 순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디 우리네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 우리의 뿌리를 되찾는 것, 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우리가 누구의 형상대로 지어졌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엑카르트가 설교 18에서 지적한 대로, 그것은 우리의 신성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쑥 빼닮은 것을 낳는 것이다.(393)


<금주간 성서읽기> 에페 1-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오직 홀로 살아가다
히야친따는 혼자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혼자 살아가야’ 하는 루치아의 경우는 더더욱 큰 희생이 아니었겠는가!
루치아는 카베소의 동굴에 숨어서 끝없는 추억에 잠기면서 오직 홀로 눈물 중에 기도하는 날이 잦았다. 지금은 가버린 정겨운 두 벗이 꺾던 꽃,앉아 었던 돌마저 모두가 추억의 향취가 배어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예감이라고나 할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려 반신반의 중 여느 때처럼 히야친따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급하게 그녀의 방에 뛰어들어갔다. 물론 그 당시 히야친따는 리스본에 있었다. 히야친따가 천국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바로 그 후였다.
히야친따의 유해가 빌라 노바 드 우렘 요지에 이장된 며칠 후 올린삐아 아주머니는 루치아를 데리고 성묘를 갔었는데 이때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서로 떠나 있다는 고통을 심각하게 느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루치아는 하느님께
‘주님, 나도 저 두 벗들과 함께 있게끔 주님 곁에 불러 주십시요"
하고 간청하게 되었다.
그련데 얼마 후 부임해 오신 친절한 레이리아의 새 주교는 이 영혼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아 주었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은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특히 성직자들은 고바 다 이리아의 사건에 관한 한 어떠한 역할도 담당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13세의 소녀가 이곳에 모여드는 신자들의 안내와 그 밖의 일을 모두 맡아 하고 있었다. 도대체 교회 당국은 이런 책임을 언제까지 한 소녀에게 맡겨 두고 있을 것인가?
1922년 5월 3일 교서에서도 선언하고 있듯이 주교는 몇 차례나 루치아에게 심문을 던져 보았는데 그 대답은 단순 솔직하였고 더구나 신앙과 도덕에 위배되는 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