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사순절의 끝으로 달려가는 오늘 복음은 이해하기 아주 쉽지 않은,
그러나 담고 있는 뜻은 너무도 심오한 얘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족을 사랑하셨다면서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도 이틀이나 더 머무시고,
죽은 뒤에는 나흘이나 지나서 방문하신 겁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하셨다면
아플 때 즉시 방문하고
죽기 전에 찾아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이렇게 원망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원망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주님께 대한 신뢰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인간적인 사랑이나 하고 보여주려고 오셨다면
애초에 아프지 않게 하셨을 것이고 죽지 않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자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병과 죽음에서 구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병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희망을 지니며 살게 하고,
죽고 난 뒤에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자로를 살리실 때 늑장을 부리시고,
뜸 들이신 것은 숙성된 희망과 숙성된 믿음을 위해서이고,
라자로 예를 보며 우리도 그것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지 못하는 이유는 완전히 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어야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도 있는 것인데
우리는 반쯤 죽다가 다시 살아나니 부활도 미완성이거나 불완전합니다.
이것을 영과 육에 적용하면 육신과 함께 육도 완전히 죽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육적인 영(정신)이 반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하느님의 영께서 내 안에서 완전히 살아계시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육신이 죽을 때까지 뜸 들이시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 곧 육이 죽고 영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만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참 희망을 안고 살고,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보시고도 뜸 들이실 때
이러한 희망과 갈망을 실제로 우리가 지닐 수 있느냐 그것이고,
평화롭게 참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기도하고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