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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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강론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주님 성탄의 문턱, 정점에 서 있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예언이 오늘 복음에서 실현됩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요셉에게 알려 줍니다. 이렇게 대림 시기의 마지막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곧 ‘임마누엘’이신 주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하신 복음은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자손이시고, 신성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우리가 기도와 전례 안에서 늘 고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주’라는 말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떠받드는 신앙고백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자렛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마태오 복음의 주님 탄생 예고 이야기는 그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와 바로 연결됩니다. 족보는 메시아를 역사 안에 자리매김하면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려고, 하느님 백성의 총체적인 역사를 종합적으로 제시합니다. 탄생 예고 이야기는 이어서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어디에서 오셨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심을 밝혀 줍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역사의 흐름, 사건의 방향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창세 16,7-13; 탈출 3,2) 하느님을 가리키는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언자적 영감의 은사를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의사소통의 방식입니다(창세 20,3; 28,12; 욥 33,15).
이렇게 하여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예수의 아버지로서 책임을 떠맡게 됩니다. 요셉은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요셉의 이름과 연결됩니다.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지만, 요셉을 통하여 다윗의 자손이 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참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드러냅니다.
다른 탄생 예고 이야기에서처럼 천사는 아기의 이름을 알려 줍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예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구원’을 뜻하는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자’라 불리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신명 32,15; 1사무 10,19; 루카 2,11). 1세기 유다인들의 세계에서 이 호칭은 오직 하느님께만 쓰였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해방자의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그를 ‘구원자’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구원자’로 불리십니다. 특히 ‘죄에서 구원하다’라는 표현은 더욱 놀라운 고백입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수는 있겠지만, 죄에서 구원할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속합니다.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내려오십니다.
바로 그 구원자요 해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을 기쁘게 준비하는 은총의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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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7-14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2. 희생: 속죄의 보속 제물
성체성사는 어린양과 그분 교회의 혼인이다
우리는 육화가 교회,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그 몸의 머리이신 하느님의 어린양 사이의 신비로운 혼인을 성취하기 위해 질서 지워졌다고 말하였다. 이 혼인적 결합은 새 계약의 핵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신비로운 혼인에 대해 비유들 안에서 말씀하셨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 혼인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우리는 이 혼인의 실현에 두 가지 순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완전한 절정은 하늘의 예루살렘, 곧 우리가 어린양의 영광을 보고 영원히 그분과 하나 되어 영원한 천상의 포옹 안에 머무르게 되는 지복직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 마지막 장들에서 신비롭게 묘사된, 우리의 모든 희망의 목표이다.
그러나 그 천상의 포옹은 하늘에서만 전적으로 미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신적 배필께서는 우리가 갈망과 나약함으로 인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이 지상 삶의 여정 안에서도 교회와의 혼인을 완성하시기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께서 눈물이 가득한 이 골짜기, 곧 우리가 ‘눈이 아니라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들과 이 신비로운 결합을 이루실 수 있었는가?
그분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공로를 빼앗거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의 훌륭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유배 상태의 본질적 조건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혼인을 완성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의 재림 때까지 유배지에 머물러야 하는 신부와의 혼인이 완성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지혜는, 유배 중인 신부에게 그녀의 시련의 상태에 부적절하지 않은 혼인 잔치를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 잔치가 바로 성체성사이다.(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