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다.”
오늘 율법 학자에게 하신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지식이란 게 무슨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지식의 열쇠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지식이란 하느님께 대한 지식,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지식이 아닐까? 제 나름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명색이 학자이니 지식이 없는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누구보다 뛰어나고
세상에 대한 지식도 넘치도록 풍부할 것입니다.
다만 세상 지식 때문에 하늘나라에 관한 지식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왜 세상 지식은 많은데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은 없습니까?
주님 말씀대로 이들이 그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의 열쇠는 겸손이고,
그러니까 그 열쇠를 치워 버리는 것은 교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장인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은 10장과 11장을 나란히 배치하고,
철부지들과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교하는 겁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바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
달리 표현하면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다는 사람은 안다고 생각하기에 알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기에 지식의 열쇠를 아예 치워 버린 것입니다.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면 알려고 할 것이고,
알려고 할 때 다시 말해서 물을 때 앎이 시작되는 것인데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알려고 들지도 시작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아는 것이 하늘나라를 아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세상을 제대로 알면 하늘나라도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만 안다면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집착하면 세속이 되고
우리가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원수이지만
하느님 창조물로 관상하면 하늘나라를 아는 열쇠요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첼라노는 이렇게 프란치스코를 묘사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마귀와의 관계에서는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선하신 하느님의 매우 밝은 표상으로 보았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고 피조물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으며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그는 홀로 모든 사물에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
어쨌거나 겸손은 모름이 앎의 시작이 되게 하고,
자신이 모르는 신비를 하느님께서 열어주십사고 청할 것입니다.
그러니 신비의 열쇠를 걷어차 버리는 교만과 집착은 버리고
신비의 열쇠를 주십사고 겸손과 사랑을 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