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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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8)
양심을 씻어라
그리스도께서 덧붙이신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는 말씀은 어째서 사람을 잔과 접시에 비유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나 예식을 올리며 제물을 바칠 때마다 몸과 의복과 그룻을 씻었지만, 자신들의 죄는 씻을 줄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몸이 깨끗한 것을 칭찬하지도 몸이 더러운 것을 단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하느님께서 몸과 그릇 같은 것들이 더러운 것을 싫어하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일상적으로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이런 것들의 더러움을 싫어하신다면, 우리가 늘 깨끗이 유지할 수 있는 인간 양심의 더러움은 얼마나 더 싫어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물로 씻어야 하는 그릇이 아니라 기도로 씻어야 하는 양심입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26절). 대접의 속이 깨끗한지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대접의 겉이 더러우면 사람들은 대접을 씻습니다.
사람은 … 내적인 죄로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물 한 방울 없이도 하느님 앞에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었다면, 바다와 세상의 모든 강물에서 몸을 씻는다 해도 하느님께서 보실 때 더러움으로 시커멓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나는 요한 복음 세 구절을 라틴어로 읽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첫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그리스도째서 말씀하신 둘 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5,15). 그분께서 말씀하신 셋째 구절은 이러합니다. “내가 그대들을 뽑았습니다. 그대들이 떠나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도록 하시오”(요한 15,16),
첫째 구절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구절에 대하여 약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서로 사랑하시오."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어떤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분은 여러분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훌륭한 스승들이 우리가 지녀야 할 사랑을 가리켜 성령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은 순수하고, 단순하고, 공평합니다. 이 사랑을 부인하려고 했던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이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밖에 없습니다. 성령만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없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공평한 차원의 사랑은 다름 아닌 하느님입니다. 스승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목적은 선이다, 사랑으로 하는 모든 일은 선을 지향한다, 선은 하느님이다. 나의 눈이 말을 할 수 없고, 나의 혀가 색을 볼 수 없듯이, 사랑도 선과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을 지향할 수 없습니다.(456)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8-10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5. 그리스도인 일치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1절: 종교개혁의 전제들
개혁의 요구:
교회개혁에 대한 외침이 전반적으로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당연하지만 개혁을 오래 끌었다는 데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여전히 지도적인 영적 권력이었고 또한 그 생활로써 사회구조 전체에 침투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교회는 도처에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거부는 그만큼 사회에서 더 불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인츠의 비방 문서 (1451) 이래 끊임없이 제출되고 보름스 제국의회에서(1521) 100개의 불만으로 모아진 <독일 국가의 소원>은, 교황청의 과세와 행정의 실천, 교회의 법률과 소송제도를 더없이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중세 중기 이래 교회의 법제화가 큰 진전을 보였고,
그래서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불쾌감이 지반을 공고히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가견적” 교회에서 떠나 순전히 영적인 “불가견적”인 교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영적 교회, 현존의 교황의 교회와 교대하게 될 “성령의 교회”라는 이념은 피오레의 조아키노 수도원장( +1202)에 의하여 전개되었고,
13∼14세기 프란치스코회의 엄격주의자틀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것은 중세 말기의 묵시록적인 기대와 결합되어 새로운 주관적인 신심을 형성시켰는데, 종교적인 만족을 종종 교회 밖에서 찾았다.
이 “새 신심”은 반교회적일 필요는 없었고, 교회와 공존할 수 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의 흐로테(1340∼1384)가 1380년경 데벤테르에서 기초를 놓은 “데보시오 모데르나”는 어디까지나 교회에 충실하게 머물렀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신심을 목표로 삼고, 그 힘을 교회 전례의 참여와 성사보다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명상과 산상설교의 정신에서 얻어냈다. 흐로테의 제자와 동료들인 “공주생활 형제회” 출신인 토마스 아 챔피스(+1471)의 유명한 「준주성범」에서 교회와성사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인 성서 독서가 중심점으로 옮겨졌다. 성사, 특히 미사는 이미 십자가 희생의 성사적인 재현으로 체험되지 못하고, 다만 사적인 기도를 위한 기회로 평가되었다. 이렇게 교회와 성사의 구원 등급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본래 교회 내부의 개혁을 목적으로하였던 “데보시오 모데르나”는, “루터의 유심론을 미리 준비한” 결과가 되었다.(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