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높은 지위에 따르는 큰 책임
우리 창조주께서 보여 준 자비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하잘것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하느님 의 친구로 불리다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얼마나 영광스 러운 지위에 있는지 들었습니다. 이제 그에 따르 는 조건이 무엇인지 들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이 그 조건입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하느님이 신적인 빛으로 우리를 건드리기만 하면, 우리도 바오로처럼 회심을 하거나 지식이 변모될 것이다. 엑카르트는 회심과 변모가 일어나기 전 에 찾아오는 어둠을 마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용기를 북돋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신적인 어둠과 빛을 가로막는 어둠을 구분한다. 빛과 어둠이 힘께할 수 없다. 따라서 빛과 어둠이 서로 부딪히면. 둘 중에 하나는 자리를 내주게 마련이다. 악행과 죄로 말미암은 어둠은 빛을 가로막지만, 또 다른 어둠인 버림은 빛에 자리를 내주고 변모가 일어나게 한다. 하느님이 이 안으로 들어오면 피조물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엑카르트는 실질적인 악이 우리의 버림을 가로막는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것은 항상 통제하려고만 하기에, 하느님조차도 거기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러한 길로 들어선 사람은 바깥일과 표피적인 일에 굴복하게 마련이며, 결코 자신의 신적인 근원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그들이 너무 먼 데로 나가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안으로 돌아오지도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리하여 그들은 진리를 놓치고 만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혼의 터 안 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의 말은 그러한 자들을 도덕으로 교화하거나 단죄해야 한다는 암시를 전혀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엑카르트의 말에는 슬픈 빛이 감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진리를 놓쳤을 뿐이기 때문이다.(387)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4-28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2절: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교황의 선거:
특별한 방법에 따라 모든 참가자들의 마음에 들고, 그래서 일반적인 숭인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발견되어야 하였다. 그래서 26명의 추기경 외에도 5개국에서 각기 여섯 명의 대표들, 총 56명의 교황 선거인들이 1417년 11월 8일 콘클라베로 들어갔다. 콘스탄츠의 대상점이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하여 정비되었다. 선거의 방법은 대단히 복잡하였다. 그래도 3일 후에는, 그동안 밖에서는 기도의 행렬이 통과하고 있었는데 “콘클라베에서는 종교적으로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것이 동시대인들에게는 성령의 기적으로 보였다. 1417년 11월 11일 추기경 오도 콜론나가 당선되었다. 그는 그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라 자신을 마르티노 5세로 불렀다.
비단 공의회만이 아니라 전 서구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찼다. 40년간의 분열이 극복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가 재건되었다. 교회는 모든 이로부터 승인되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우두머리를 다시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 20세기의 인들은, 우리도 그러한 일치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보다 이 기쁨을 더 잘 느낄지 모른다. 어쨌든 분열은 그리스도교계가 만날 수 있었던 최악의 것임을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된다.
공의회 이후, 바젤의 공의회 무위설:
교황 선거 후 공의회의 사회는 즉시 새 교황에게로 넘어갔다. 마르티노 5세는 개혁을 포함한 모든 사안을 즉시 인수하였고, 그래서 쉽게 체제상의 위기가 될 수도 있었던 교황직의 중대한 위기를 사실상 극복하였다. 그는 1418년 4월 28일 공의회를 폐회하였다. 사실 어느 정도로 그가 「헥 상타」와 「프레웰스」 교령들을 공의회주의적인 뜻에서 비준하였고, 그래서 신앙교령으로 격상시켰는지에 대해 많이 논쟁된 문제는 이론의 여지없이 부정적으로 대답되어야 한다. 처음 보기에 불확실하였던 것이 이 두 교령의 내용과 의미가 양면 가치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설명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온건하고 정통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급진적이고 이단적인 공의회 지상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