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을 위주로하는 신앙생활의 위험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여러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신자들의 영적 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교회가 지향하는 본질적인 가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말씀과 신심의 차이
복음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직접 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온유하고 겸손함과 내어주는 사랑을 배우고 견딤과 기다림 안에서 용서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이는 신앙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은 성인 공경, 특정 발현에 대한 믿음, 특별한 기도문 암송 등 특정 영적 활동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심은 복음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여야 합니다.
신심 위주 신앙생활의 위험성
1. 본질에서 벗어난 신앙
신심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면, 복음 말씀을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 형성이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예를 들어, 묵주기도를 수십, 수백 번 바치는 것에만 몰두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지 않거나, 특정 성인의 도움만을 구하며 하느님께 직접 다가가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2. 영적 우상화와 배타성
특정 성인이나 성모님의 발현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 대상을 우상화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단체나 영성만이 진정한 신앙"이라는 배타적 태도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신심을 가진 공동체를 경시하거나,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해석에 끼워 맞추는 위험을 낳습니다.
3. 신앙의 기복화와 감정적 의존
특정 신심 활동은 기도나 영적 체험을 통해 즉각적인 위안이나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감정적 경험에만 의존하게 되면, 삶의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인내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 어렵습니다. 신앙이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기복적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4. 복음적 사회 참여의 약화
신심 활동에만 몰두하는 신자들은 자신이 도구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관계 안에 선이 흐르도록 사회적 약자를 돕거나 불의에 맞서는 복음적 실천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사명을 주지만, 신심 위주의 신앙은 종종 개인의 구원이나 영적 평안에만 초점을 맞추어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신심은 신앙의 아름다운 표현이자 훌륭한 도구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 말씀이라는 토대 위에 신심이라는 건물을 짓는 것이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심 위주의 신앙을 하게 만드는 세 가지 원인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반신자들의 신앙에 깊숙히 스며든 펠라기우스주의와 얀세주의 완전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심위주의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복음에서 점점멀어지는 현상은 근본주의 성격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해 보면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 일부 신자들이 보이는 신앙의 특징들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을 펠라기우스주의, 얀센주의, 완전주의라는 세 가지 신학적 경향과 연관 지어 설명하고, 이것이 어떻게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로 이어져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는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신학적 배경: 펠라기우스주의와 얀센주의
1. 펠라기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 없이도 자신의 자유 의지와 노력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사상입니다. 이는 인간의 죄와 나약함을 경시하고, 인간의 '행위'와 '노력'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강조합니다.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통과 '열심히 하면 된다'는 근면 성실의 가치관과 결합하여, 기도문 수백 번 외우기, 새벽 미사 빠지지 않기, 헌금 많이 하기 등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내가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할 것이다, 라는 명제 아래 모든 중심에 나를 두게 하며 나의 업적과 공로가 인과응보의 가치체계를 만들어 그렇게 하는 신앙생활'이 곧 하느님께 인정받는 길이라고 믿게 됩니다.
2. 얀센주의
얀센주의는 하느님의 은총이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지만, 그 은총이 극히 소수에게만 주어지며, 인간은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엄격한 사상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고통스럽고 어렵게 만듭니다.
얀센주의의 엄격함은 한국 신자들 사이에서 완벽주의와 죄책감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아직 부족해, 이 정도로는 하느님께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기쁨이 아닌 의무와 고행으로 여기게 됩니다. 미사, 기도, 보속, 봉사 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괴롭힙니다.
신심 위주 신앙과 근본주의적 성격
펠라기우스주의와 얀센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신자들은 인간의 행위와 노력(펠라기우스주의)을 통해 완벽한 신앙(얀센주의)을 이루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복음 말씀 자체가 아닌, 정해진 기도나 형식에 집중하는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로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신심 위주의 신앙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맹목적인 규칙 준수와 특정한 기도문을 외우면 그에 합당한 은사를 받겠다는 마음이 복음의 본질인 '사랑'과 '자유'보다 정해진 기도나 의무를 완벽하게 지키는 것에 집착합니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규칙 준수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와 유사합니다. 또한 배타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신앙 방식만이 옳다고 여기며, 다른 신앙 공동체나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기도 모임에 참여하지 않거나 다른 영성을 따르는 신자들을 덜 성실한 신자로 여기기도 합니다.
외적인 신앙 활동에만 몰두하다 보니, 내면의 성찰과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등한시하게 됩니다. 신앙이 ”누구를 찾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찾느냐“의 문제로 전락하고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신심이 깊은 것을 넘어, 구원과 신앙의 본질을 '인간의 행위'와 '완벽주의'에 두는 위험한 경향입니다. 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롭고 사랑 넘치는 복음 정신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적 요소임에도 신심위주의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게합니다.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은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자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이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라“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모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라“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며 화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뒷전으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수십 단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도 정작 가족이나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거나,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다른 봉사자를 비난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외적인 행위는 충실히 수행하지만, 내면의 변화와 복음적 실천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심을 넘어 복음으로 나아가기
신심 활동은 복음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그분의 순명과 사랑을 본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살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묵주 기도는 그저 많은 기도를 바치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성모님의 삶을 묵상하며 그 정신을 배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심이 복음의 본질인 따름, 사랑, 용서를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 머무를 뿐 진정한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 신앙은 자칫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위선에 이르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