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얘기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신 얘기입니다.
오늘 얘기에서 마귀들이 주님께 상관없는데 왜 왔느냐,
괴롭히려고 왔냐고 따지고 든 것은 그래도 이해되지만,
그리고 돼지 주인들이 떠나달라고 한 것도 이해되지만,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떠나가 달라고 한 것은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닐지라도 왠지 씁쓰레합니다.
사실 주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귀 들린 사람들의 불행을 다 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을 불행에서 건져주신 주님을 떠나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돼지 주인들이 재산상 피해받은 것을 보고 동정하거나 분노하여 그런 걸까요?
어쨌거나 주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재산상 피해를 주는 분으로 여기는 겁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도 이웃이고 돼지 주인들도 이웃인데
마귀 들린 사람들이 그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받은 것보다 돼지 주인들이
재산 피해받은 것이 마을 사람들에겐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이 비 구원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자 청년의 그 안타까움이 자연스럽게 소환됩니다.
하느님을 만남이 구원이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 구원이어야 하는데
그는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하나도 잃지 않고,
지금의 건강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지금의 부모, 형제, 아내, 자식과 그대로 영원히 같이 사는 것,
이것이 그가 주님께 얻고자 했던 영원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한 것은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었고,
하느님께 받고자 한 것도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거요 욕심부리는 거였습니다.
이는 마치 엄마와 아이의 그 어긋남과 같습니다.
엄마는 건강식품을 주려는데 아이는 불량식품을 달랍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이 어긋남이,
주님과 마귀 사이의 어긋남과 같거나
적어도 주님과 마을 사람들 사이의 어긋남과 같지 않습니까?
구원을 주시려는데 그것을 괴롭힘으로 여깁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데 그건 필요 없고 재물이나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어긋난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합니다.
이렇게 계속 어긋날 거면 떠나가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나는 어떻습니까?
주님과 나 사이에 이런 어긋남이 없습니까?
주님께 계셔주십사 청합니까? 떠나가 주십사 청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