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9,1-8
주님께서 가장 먼저 보신 것은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곧 그를 평상에 누여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없던 한 사람을
주님 앞으로 데려간 것은
바로 그 곁의 사랑과 돌봄이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남의 믿음’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 기도할 힘조차 없을 만큼
무너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를 들어 주님께 데려갈 때,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말합니다.
서로를 위한 기도와 돌봄이
이토록 큰 힘을 지닌다고.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몸보다 ‘죄’를 먼저 고치셨다는 점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크리소스토모는 여기서
주님께서 겉으로 드러난 병보다
그 아래 숨은 더 깊은 상처를 먼저 어루만지심을 봅니다.
참된 치유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와 상처가 용서받을 때,
비로소 사람은 안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율법 학자들은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며 속으로 분개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용서를 보이는 치유로 증명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들고 집으로 가거라.”
한때 그를 실어 나르던 평상을
이제는 그가 들고 걸어갑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자기를 짓누르던 것을 도리어 짊어지고 일어섭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께서 건네신 첫마디는 “얘야, 용기를 내어라”였습니다.
치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나를 들어 데려간 이들과 함께 받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때 도움을 청할 줄 아는가?
나는 누군가를 주님께 ‘데려가는’ 친구인가?
나는 겉의 문제 뒤에 숨은 깊은 상처를 보는가?
나는 “용기를 내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주님,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저를 친구들의 믿음에 실어 보냅니다.
겉의 병보다 깊은 제 상처를 먼저 어루만지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시며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저 또한 연약한 이웃을 들어 당신께 데려가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