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제자들끼리 호수를 건너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주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십니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아직’에 초점을 맞춰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아직 제자들에게 가지 않으셨을까요?
오늘 복음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과 달리
제자들이 왜 자기들끼리 떠났는지
주님은 왜 같이 떠나지 않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고 함으로써 애초부터
제자들끼리만 가게 할 생각은 없으셨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함께 가실 생각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같이 가시지 왜 제자들끼리만 가게 하신 걸까요?
물론 주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났을 수도 있고,
닥칠 일을 생각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만만하게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나중에 보게 되듯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합니다.
우리 수도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없이 우리끼리 서로 합을 잘 맞추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갔다면 우리 공동체도 풍비박산 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것이라면 주님께서 이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신 것일 겁니다.
자기들끼리만 떠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막지 않고 내버려 두신 겁니다.
인생의 어둠이랄까 어두운 밤이랄까 이런 것을 겪어보라고,
집안이 몰락하고 생사가 오가는 체험을 해보라고,
그런 가운데서 있는 힘 다 써 기진맥진하게 되고
극도의 두려움도 체험해보라고 내버려 두신 겁니다.
두려움은,
두려움 중에서 극도의 두려움은,
그것도 피할 수 없는 극도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고 그래서 마침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피하지 않고 극도의 두려움을 직면하기만 하면
분명히 하느님을 체험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극도의 두려움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주하지 못하는 저를 주님께서 언젠가 극단으로 모실 것입니다.
나병 환자를 그렇게 두려워하던 프란치스코를 주님께서 직면하게 하셨듯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자
구리 불 뱀을 만들어 매달아 달고 우러러보게 하셨듯이 저도 직면하게 하실 때
그때 제 입에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길에서 배가 뒤집히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풍파 때문에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안 계시기에 뒤집힌다는 것을 깨닫도록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