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자
사람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아기의 할례식에서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녀가 말한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 집안에는 없는 이름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한 번 더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확정하며
그때에 그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똑같이 주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기가 받은 이름은
그의 집안에는 생소한 이름입니다.
사람에게서 온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아기가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자라기를
희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을 좋아하고
낯선 방식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익숙한 방식이 편안하고
낯선 방식은 조금 더 신경을 쓰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우리의 방식을 모두 무시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우리에게 좀 낯설기도 합니다.
성령을 통한 동정녀의 잉태는
여느 인간의 방식과 다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예수를 계속해서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지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은
우리에게 익숙함을 깨고 낯설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익숙함이 모두 무시되지는 않지만
낯설음을 함께 생각할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고
그렇게 우리의 삶도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익숙함과 낯설음의 그 긴장 속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